[독후감] 미움 받을 용기
서론
수 년 전 꽤나 바이럴을 탔던 책으로 기억한다.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미움받을 용기’라는 어구는 일상 생활에서도 관용구처럼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책의 서론을 살펴봤을 때 뻔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아들러’의 심리학에 관한 책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프로이트, 융과 달리 세간에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아들러는 ‘개인 심리학’을 통해 열등감을 극복하여 우월성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동기라는 내용을 칼 포퍼의 반증주의 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했던 기억이 있다.
내용
한 청년과 철학자가 서로 토론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구조로 쓰여있다.
그의 철학은 프로이트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시작된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고 결정해 버리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그 자체로 결정론적이며, 염세주의에 빠지는 길이라고 경고한다. 역으로 아들러의 목적론은, 우리가 특정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 실은 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생활 양식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질이나 성격 따위를 ‘생활 양식’이라고 부른다. 생활 양식은 (선천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약 10세 무렵에 성장 환경과 배경에 따라 결정된다. 생활 양식의 특별한 점은 자신의 의지로 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과 기질을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변화가 수반하는 여러 ‘불안’들을 감내하고도 자신의 생활양식을 바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안락한 삶 속에 자족하는 것이 변화를 통해 감수해야 할 불확정성보다 편하기에, 현재의 생활양식에 불만이 있어도 그것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보수성’에서 귀인하는 현상인 것 같다.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다.
인간관계와 열등감
아들러 심리학은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고민과 문제들은 모두 타인과의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인간이 느끼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주관적 해석에 의해 느끼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열등감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의 근거로 객관적으로 가장 우위에 있는 사람도 열등감을 느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아들러는 이러한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보편적 욕구를 ‘우월성 추구’ 라고 정의하였다. 우월성 추구의 동력이 되는 열등감 그 자체는 나쁜 것 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때 올바른 우월성 추구에서 열등감의 비교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더 이상적인 나 자신이다. 반대로 열등감을 느끼는 비교 대상이 타인이 될 때 우리는 그 열등감을 ‘열등감 콤플렉스’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이는 앞의 열등감과는 다른 개념으로 일종의 도착이 포함된,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역으로 ‘우월 컴플렉스’ (즉 자랑) 또한 열등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데, 자신이 자랑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없기에 더욱 당당히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가진 ‘연약함’을 무기화하는 것도 일종의 우월 컴플렉스이다.
인생의 과제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 인간관계로부터 만들어지는 고민거리들이, 실은 인생의 과제(task)의 실패에 의한 것임을 주장하였다. 인생의 과제는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로 나뉘며 이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해야만 한다.
인정욕구의 부인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정욕구’를 부인한다. 더 정확히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행동하고 살아가지 말고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새로 등장한 개념은 ‘과제의 분리’인데, 우리는 타인의 과제에 개입해서도, 타인이 내 과제에 개입해서도 안된다. 이로서 타인의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타인을 통해 인정욕구를 채우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과제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의 분리는 언뜻 보아서는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설파하면서도 타인의 감정과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들러는 과제의 분리야 말로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러한 과제의 분리, 인정욕구의 부인이 상식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적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과제의 분리가 자기중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자기중심적인 것은 타인의 과제에 자신이 개입하고 대신하려는 행동 자체이다.
자기중심성과 과제의 분리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 더 정확히는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관계를 경시 여기는 것으로 보이는 아들러의 심리학에서 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는 ‘공동체 감각’이다.내가 있어야 할 곳은 공동체 안이며, 타인을 친구로 여기는 것을 ‘공동체 감각’이라 한다. 인간관계의 목표인 공동체 감각을 위해서는 자기중심성(self interest)을 버리고 타인에 대한 관심(social interest)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중심성은 보편적 의미의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과제의 분리를 하지 않고 인정욕구를 바라는 경향을 의미한다. 타인에게 개입하려 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타인을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거울 삼아 그속에서 나를 발견하려는,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임을 알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려면,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사람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까’가 아니라 ‘이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의 공동체의 공헌(commit)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쟁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아들러는 다소 과격한 언어로 ‘칭찬’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칭찬은 인간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칭찬에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변인에게 칭찬도 비방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앞서 과제의 분리에서 ‘개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적으로 바라볼 때의 상호작용이다. 반대로 우리는 타인을 ‘지원’함을 통해 그들의 과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옆에서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이를 다른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용기 부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 감각과 공헌감
실존적으로 우리는 타인에게 ‘칭찬’이 아닌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아들러는 ‘고맙다’는 순수한 감사의 표시를 하라고 제언한다. 수평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두고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맙다는 언어를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였음을 전달할 수 있고, 내가 타인에게 (공동체에게) 공헌했다는 사실을 느낌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행위로써 타인에게 공헌하는것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타인에게 공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병원비를 축내고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살아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기쁨이 되고 힘이 되는 존재이기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들러는 공동체 감각을 기르기 위해 ‘자기 수용’, ‘타자 신뢰’, ‘타자 공헌’의 세가지 키워드를 제시한다. 자기 수용은 이해하기 쉽다. 자신의 능력과 주어진 천성에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그러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기 수용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긍정적 포기’가 수반된다.
둘째는 ‘타자 신뢰’이다. 타자 신뢰는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 다른 조건을 달지 않고 믿어주는 신뢰를 의미한다. 내가 타인을 향해 보이는 태도는 나의 과제인 것이고, 상대가 거기에 보답할지, 배신할지는 타인의 과제일 뿐이다. 타자 신뢰를 통해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공동체 감각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맹목적으로 타인을 신뢰하라는 뜻이 아닌 수평적 인간관계를 위한 수단적인 접근일 뿐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타자 공헌은 자기희생을 하지 않는 선에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이다.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로 타자공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행복은 공헌감이다.
행복이 공헌감이라면,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정욕구 또한 행복과 직결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인정욕구에 지배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유가 없다. 타인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헌감을 통한 공동체감각의 추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도 더불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월성을 추구하는 것,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보편적 욕구이다. 비행행동과 복수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안이한 우월성 추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 행동을 통해 상대를 난처하게 되면서, 자신은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특별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심보가 꼬인 사춘기 청소년처럼 안이한 우월성 추구를 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평범해질 용기’이다.
아들러의 인생관
아들러는 산 정상을 바라보며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것’, 춤을 추듯 살아가기를 제안한다. 삶의 종착역, 목적지가 존재하는 kinesis적 인생이 아니라, 당장의 목적이 없어도 춤을 추는 현실에 충실하는 energeia(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을 살라고 한다. 선을 따라 최종의 목적지로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 한 점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지금, 여기’에 집중해서 살아가기를 권면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는 없다고 주장했다. 허무주의나 향락주의적인 사고로 빠지지 아니하고,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부여하는 것)’ 이라고 말하였다. 그 부여하는 의미는 다름 아닌 ‘타자 공헌’이다.
느낌
아들러의 심리학이 ‘개인심리학’으로 불리는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개념과 해석이 ‘나의 행복’, ‘내가 할 수 있는 것’, ‘나의 과제’이며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하되 공동체 안에서의 ‘나’로써 공동체에 공헌하고, 공동체는 나에게 공동체 감각을 주는 수지타산적인 관계 하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아들러의 ‘공동체’는 어쩌면 일종의 확장된 개념의 타자가 아닐까?
또한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기존 이론에 반대되는 안티테제의 성향을 띄는 것들이 많았다. 모든 것을 트라우마로 설명하는 것은 비합리적일 수 있어도 분명 어린시절의 환경, 과거의 트라우마는 우리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원인론에 대한 완전한 긍정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과거와 배경에 대해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현재와 전혀 상관 없는 과거 사건이라고 취급하는 것은 그들의 살아온 삶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행복은 공헌감일까? 이 질문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반례를 찾을 수 있었다. 자연을 감상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하다 못해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상쾌한 기분으로 느끼는 행복은 공헌감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물며 자아실현은 어떠한가. 악기를 연습하고, 원하는 일을 달성했을 때에 느끼는 성취감은 행복이 아닌가? 분명 공헌감도 행복의 일종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사람이 타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임과 별개로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제의 분리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반박될 수 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라 할지라도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칭찬도, 힐난도 아닌 그저 언제든 지원할 준비를 한 채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것이 방임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서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수직적인 것이 맞지 않을까 라는 어쩌면 다소 고리타분해 보이는 생각과, 연인이나 부부관계라는 수평적 관계 속에서도 때로는 나를 희생하고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정반합에서 ‘반’에 해당하는 이론들이 그런 경향이 있듯이 일단 기존의 상식과 이론을 반대하고 보고 그 이후에 근거들을 끼워맞춘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춤을 추듯이 흘러가보자’
내가 좋아하게 된, 유다빈밴드의 ‘항해’라는 노래 가사 중 한 소절이다. 춤 추듯이 살아가는 것, 현재에 충실하여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이 아닌 ‘지금 여기’의 현재에 충실한 energeia적 인생.
애석하게도 ‘항해’의 나머지 가사는 아들러의 심리학, 특히 인생관과는 거리가 있다.
- ‘수없이 연결된 실’ - 연속적으로 이어져 가는 삶과 관계
- ‘영원히 남을 매듭과, 시간의 흐름을 기억하는 것’ - 과거의 사건(트라우마는 아니겠지만)을 추억하고, 회상하고 반추하는 행위를 중요시 한다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가깝다
-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사라질까’ - ‘지금 여기’를 살으라는 주장과 달리 과거와 미래에 포커스를 둠
- ‘항해’의 속성 자체와, ‘흘러가보자’ - 유체의 흐름으로 표현한 인생은, 점들의 집합으로 표현한 아들러의 인생관과 대비됨.
전반적으로 아들러의 개인주의 심리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존의 테제를 반박하기 위해 만든 개념들이 엉성하게 조합된 것처럼 보였고, 각자의 개념에 대한 설명은 사례 중심적이어서, 이를 보편적인 현상으로 만들기 위한 귀납적 추론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미비해 보였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특히 일본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끈 이유를 알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나’와 타인의 선을 긋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 하는 일본인들의 개인주의적 관념과 아들러의 심리학이 잘 맞아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