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이] 기말고사 답안
문제 1
플라톤의 «향연» 194d-212b를 네 개의 부분으로 구별하고 각각의 내용을 서술하라(25점) 그리고 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자유롭게 서술하라(10점)
플라톤의 향연은 총 4가지 파트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랑의 본성, 사랑의 목적, 사랑의 활동, 사랑의 최고 표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사랑의 본성에 관한 부분은 (처음 - 204c)까지이다. 텍스트에서 사랑을 “에로스”라고 일컫고 있으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사랑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계’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가톤에게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가 자기 자신 만으로 아버지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나 딸과의 관계로부터 아버지라고 정의되는 것 처럼 사랑 또한 그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나 자신 만을 생각하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관계속 에서의 실현을 의미한다. 또한 플라톤은 에로스 혹은 욕망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즉 결핍에 대한 욕망이라고 표현한다.
” (…전략) 즉 욕망하는 것은 자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 혹은 결여하고 있지 않으면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연인지 숙고해 보게. 아가톤, 나 한테는 놀라우리만큼 분명하게 그게 필연이라고 생각되네만, 자네에겐 어떤가?” (향연, 200b)
또한 지금은 결여하고 있지 않더라고 앞으로도 계속 가지기 위해, 즉 미래 결핍의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사람은 욕망한다. 이를 통해 부자가 계속 재산을 욕망함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디오티마라는 여인의 말을 빌려 플라톤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지 않다가 무지하다와 같은 말이 아닌 것 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말이 추하다는 말과 같지 않으며, 아름다움과 추함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또 사랑은 가사자와 불사자의 사이, 즉 다이몬(위대한 신령)이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다이몬은 신과 인간사이의 메신저, 커뮤니케이터로 두 존재 가운데서 둘 사이를 이어주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사랑의 목적에 관한 부분은 (204d - 206a) 까지이다. 좋은 것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자기 것이 되기 위해, 즉 행복해 지려고’ 사랑한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행복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고 이는 궁극의 목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일각에서는 자신의 반쪽을 찾아다니는 것이 사랑이라고 주장하나, 플라톤은 이를 반대한다. 반쪽을 찾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좋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고 말이다. 즉 그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 (혹은 목적이 되는 것) 은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아름다움과 영원함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랑의 행위(혹은 기능)에 관한 부분은 (206b - 209e) 까지이다. 사랑의 활동을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It is giving birth in the beautiful, in respect of body and of soul” (Symposium, 206b, 영어 번역본 발췌)
낳는다는 행위는 가사자(죽어야만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영속적이고 불사적인 것 자체를 의미하며, 필멸자인 우리가 영원에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이다. 단순히 세대를 이어 종족을 유지하고 이를 후대에 남긴다는 시각보다는, 모든 사람이 이미 특정한 재능에 대한 잠재성을 ’임신’하고 있고, 그러한 잠재성은 ’아름다운 것’을 만나 출산하여 재능이 개화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랑이란 이러한 자신의 잠재성을 펼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아름다운 것은 마음 속 덕을 꺼내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최고 표현에 관한 부분은 (210a - 212b)까지이다. 사랑의 최고 표현을 이야기할 때 그는 또다시 디오티마를 통해 사랑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모든 몸으로, 행동으로, 행동에서 정신으로 점점 발전해나가며 정신에서 배움으로, 또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배움으로, 마지막으로는 아름다움 그 자체로 이어지게 된다. 그는 인간 삶의 가치는 아름다운 바로 그 것을 바라보며 살 때 행복을 느끼고 그것이 가치라고 표현한다. 즉 사랑은 그러한 인간의 최고 목적인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고 보고, 아름다움 자체를 보는 일을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플라톤의 향연을 읽으면서 사랑에 대한 정의가 단순히 인간대 인간, 혹은 인간대 사물의 사랑이라는 어찌 보면 덧없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무의미한 행위가 어떻게 우리 인간의 삶의 존재 가치와 이어지는지 그 연결고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사랑이라는 단순한 추상적 개념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삶의 목적이라는 조금 더 중요하고 논의될 만한 대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 매끄럽게 설명한 점은 높게 평가하고 싶으나, 맨 처음 주제였던 사랑의 본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먼저 사람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만을 사랑이라고 보지 않는다. 사람은 지성이나 이성이 없는 물질, 혹은 물건을 사랑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애의 경우는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경우도 있다. 또한 지식에 대한 욕망과 추구, 가시적이지 않은 개념과 이념에 대한 사랑 또한 우리는 포괄적으로 보았을 때 사랑으로 간주하고는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은 과연 ‘서로의 관계’라는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사랑을 관계로 해석하는 것 보다는 어떠한 물체나 대상에 대해 그 사람의 관심이 쏠려 있는 상태를 사랑으로 보는 것이 모든 의미의 사랑을 포괄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조심스러운 의견도 내본다. 사랑의 목적이 ’좋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임과 동시에 자신의 재능의 개화와 현실화라는 의견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여기서 또한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게 만든다. 자신의 내재적 재능은 어떠한 아름다운 대상을 만나야지만 개화할 수 있는 것인가? 올바른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년만화나 영웅담, 서양권에서는 히어로물에 해당하는 작품의 플롯은 단순히 주인공이 아름다운 것을 만나 그 재능을 개화한다기 보다는 어떠한 시련, 혹은 위험이나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그 재능이 개화되는 경우가 많다. 사랑에 대해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지만, 단순히 재능이 개화된다는 것이 ’아름다움을 만나서’라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문제 2
스피노자의 «윤리학» 1부 부록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25점),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서술하라(10점)
스피노자의 윤리학 1부 부록에서는 앞서 1부에서 설명하였던 신의 본성과 특성에 대해 다시 한번 요약을 하고, 우리가 ’필연성’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무지의 피난처’라는 용어를 통해 목적론에 대하여 비난을 가하고 있다.
먼저 신은 필연적으로 실존하며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행위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또한 신은 우주 변화의 법칙 그 자체라고 보는데, 데카르트의 신에 대한 개념과는 다르게 신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법칙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총괄하는 법칙 그 자체가 신이며, 신 또한 그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한다(필연성을 따라 행동한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한 자유라기 보다는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자유, 그렇지 않은 것이 억압당한 것이라고 본다. 이는 우리 인간 뿐만이 아니라 신 또한 동일하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하였다.
우리가 필연성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편견은 자연사물들이 목적에 따라 행동한다는 목적론적 사유를 우리가 사고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점은 스피노자는 생각과 관념 또한 사물로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스피노자는 신은 탁월한 인간이라는 신인동형론적 아이디어를 비판하였는데, 신인동형론이란 다음과 같다.
인간이 인간의 지성이 있듯 신이 신의 지성이 있는 것이다. 즉 유한에서 무한으로 다르긴 하지만 분명 그 대응관계가 존재하며, 신의 지성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탁월, 즉 완벽한 인간의 지성일 것이다.
스피노자는 여기에 재밌는 비유를 통해 비판하게 되는데, 신이 뛰어난 인간이라면, 신은 뛰어난 삼각형일 것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된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너무나도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있으며, 신이라는 것은 총체적인 자연 법칙이자 우리 모두를 포괄하는 것인데, 뛰어난 인간이라는 사고자체가 너무 편협하다는 의미이다. 또 그는 부정 신학, 즉 신에 대해 정의를 할 때 ’무엇무엇이 아니다’라고 정의 내리는 것에 대하여 비판한다. 신의 본성은 결국 필연성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는 사건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고 신조차 원칙적으로는 이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의 한정된 수명과 지성의 한계로 인해 이를 달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선 텍스트들은 스피노자가 절대적 합리주의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우리가 가지는 편견에 대해 세가지 정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들이 편견에 안주하는 이유를 인간이 목적론적으로 행위함에서 설명하며, 그것의 허위성에 대해서, 그리고 가치 개념이 편견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이고 있다.
먼저 사람들이 편견에 안주하는 이유는 목적론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인간은 본디 태어날 때 원인을 모른 채 태어나고, 결과는 상대적으로 찾기 쉬움에 반해(그냥 관찰하면 되므로), 그 원인은 오랜시간 숙고하여야먄 겨우 찾아낼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찾으려는 욕구가 존재한다. 이 두가지 인간의 본성을 종합하면, 인간은 욕구하나 그 원인을 모른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고 이는 마치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게끔 한다. 이런 편견, 즉 목적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그는 목적론이 원인과 결과를 바꾸는 행위라고 본다. 또한 이러한 목적론은 신의 존재 조차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이야기 한다. 변신론적인 논증법을 통해 이를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데, 원인과 결과로 이어져있다는 필연적 세계의 가정 하에 신은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덜 중요한 일들을 하고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 자명하다. 즉 신은 가장 완전한 존재임과 동시에 덜 중요하고 불완전한, 혹은 대체가능한 일을 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또 그는 목적론으로 고찰하다 우리의 머리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만나게 되면 그저 ’신의 뜻, 신의 의지’로 취급함을 비난한다. 이를 무지의 피난처라 부르는데, 사건을 거슬러 그 원인을 계속 파악하다보면 알지 못하는 것이 나오고 그것을 신의 의지이다 라고 간주해버린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단 하나의 진리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며, 원인과 결과의 무한한 연쇄 또한 그 필연적 법칙을 지킨다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는 가치개념들이 주관주의적 도덕이며 목적론에 의해 도출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각 사물의 기능을 우리에게 가장 유용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판단을 하는 것처럼, 질서와 무질서 또한 객관적 기준이 아닌 자신이 이해하기 쉽냐 어렵냐라는 주관적 기준에 따라 결정한다는 것이다. 비단 질서, 무질서만이 아닌 미와 추함, 선과 악함과 같이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개념들이 사실 목적론에서 비롯된 주관주의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사람마다 가치 판단이 다르므로 논쟁이 있고 회의주의로 이어지곤 하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동일한 법칙에 따라 영향을 받으므로 어느정돈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완전히 스피노자가 상대주의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나 자신, 그리고 아마도 많은 수강생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연습을 반복하여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어쩌면 필연성에 근거한 스피노자의 결정론에 별로 큰 거부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리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고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물리 현상이 일어나고 예측가능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동의하나, 그 안에서 자유의지 또한 부정하고 있는 스피노자 의견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수업 중 언급되었던 ’게으른 자의 논변’에 따르면 내가 무엇을 하든 이미 미래는 결정되어 있으므로,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것은 자칫하면 우리를 허무주의로 몰고가는 것 같다. 물론 물질론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영혼 또한 우리 뇌 속의 전기 신호로 간주되어 충분히 예측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관념적인 것들(사랑, 정의, 도덕 과 같은 것들)이 어떻게 물질 세계에 개입하는지를 보았을 때 유물론적으로 이러한 무형의 가치 또한 물질로 치환가능한 것일까?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결정론적 세계관이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이를 나의 지식과 수준에서 반박하기 어렵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결정론에 입각하여, 어차피 내가 노력하거나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의미가 없으니 마음대로 살아야지 라고 마음을 먹고 고대 소피스트들처럼 자신의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산다면, 과연 진리나 철학적인 깨달음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결정론에 따르면 결정론을 믿고 어차피 자신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진리 탐구가 아닌 욕망과 쾌락에 이끌려 사는 사람 또한 결정론에 의해 그 운명과 미래가 이미 결정 나 있는 것이다. 결정론 또한 세상을 설명하는 법칙 중 하나인데, 결정론을 가장 진실로 믿는 사람이야말로 그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의 탐구와는 가장 멀어지고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부연 설명을 하자면, 결정론을 믿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인정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세상의 물질과 가치들을 설명하는 진리에 가장 가까워져 있는 사람이 아닌가 라는 모순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제 3
«도덕의 계보» 제2논문에서 니체가 말하는 “양심의 가책”이란 무엇이며, 니체는 이를 통해서 어떤 주장을 하려는 것인가? (25점) 니체의 이러한 생각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밝혀라(10점)
양심의 가책이라는 어구에서 우리는 ‘양심’이라는 단어와 ’가책’ 즉 ’책임’이라는 단어를 뽑아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대답을 한다.
“책임이라는 이상한 특권에 대한 자랑스러운 의식, 이 희한한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가장 밑바닥 심연까지 내려앉아 본능이, 지배적인 본능이 되었다. (중략) 이 주권적 인간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도덕의 계보 제 2논문, 399)
또한 그는 죄와 양심의 가책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그는 ’약속’이라는 단어 자체를 먼저 고찰한다.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바로 그 역설적인 과제 자체가 아닐까?” (도덕의 계보 제 2논문, 395)
이 말을 통해서 결국 약속의 기본, 그 본질은 어떠한 것을 기억하는 것에 있으며, 이러한 약속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행동을 예측불허한 것에서 예측가능한 것으로 바꿔준다고 말하고 있다.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어떠한 것에서 비롯될까? 니체에 따르면 이는 고통, 강제성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평화롭게 살기 위해 폭력이나 대가와 같은 강제성을 필요로 하였으며, 이는 범죄자에 대한 형벌이라는 이름으로 근 현대 사회에 흔적처럼 남아있게 된다. 범죄자에게 형벌을 내리는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범죄자를 다시금 그런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교화하기 위해, 악행의 대가를 받기 위해, 이를 본보기로 다른 사람들이 다시 악행을 하지 않게 경고하는 차원에서와 같은 여러 해석이 존재할 수 있지만, 니체는 이를 채권자와 채무자의 계약 관계를 통해 이해한다.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돈을 갚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현대에서는 그 것을 신용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채무자에게 고통을 가하는데, 이는 자신의 잃어버린 재산을 어차피 보상 받지 못하니 이를 고통을 가함으로써 느끼는 쾌감으로 보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디스트적 사고방식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채권자 자신이 아닌 사회, 정부에게 그 처벌 권한을 넘기기에 이르렀는데, 이를 통해 상대방이 경멸당하고 학대당함을 보면서 상대적 우월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본문에서 이런 설명을 하고 있다.
“보상이란 ,잔인함을 지시하고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성립한다. (중략)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 등과 같은 도덕적 개념세계의 발생지는 이 영역, 즉 채무법이다. (중략)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이 것이 진정한 축제다. 사실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도덕의 계보 제 2논문, 405-410)
즉 죄, 양심, 의무나 책임 등이 숭고하고 신성한 진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채무, 더 나아가자면 고통과 그 무의미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힘으로 타인을 괴롭혀 쾌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도리어 괴롭히고 억누르는 과정을 통해 내면화되었다. 이 것이 결국 양심의 가책이라고 니체는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고통의 부여, 동물적이고 욕망주의적인 본능을 사회화를 위하여 버린 결과가 바로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를 부정 희생 하는 비이기적 행동의 기쁨의 주체는 바로 잔인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가 양심적인 행동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자체에 대해서 비판하려고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 자체가 신성하고 진리로부터 비롯된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인 잔인함을 사회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탓을 돌리면서 발생하는 자학적인 관념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양심의 가책”에 대한 설명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살고, 그렇게 교육 받은 우리에게 있어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죄의식, 양심의 가책이 사실은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우리 내부의 잔악무도한 이기심과 그 본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과연 우리의 양심의 가책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주로 양심이 무뎌진다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곤 한다. 어떤 일에 대해서 느끼는 죄의식이 그 행동을 반복함에 따라 점차 옅어지는 것인데, 니체의 주장인, 죄의식이 잔인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전제를 여기다 적용하면, 양심이 무뎌지는 것은 우리 속의 잔인함이 점차 그 행위를 반복함에 따라 무뎌진다는 것과 같으며, 이는 잘 대응된다. 늘 새로운 것을 찾고 욕망하는 인간의 본성과, 죄의식의 무뎌짐이 잘 대응된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러한 추론 역시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이 결국 채무법, 즉 잔인함과 고통의 방향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에서 나왔다는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죄의식이 추악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의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고통의 전가 대상이 내면화 되었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죄의식이 역설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죄의식 또한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합의된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조금 더 양심의 가책에 대해서 고찰하다 보면, 성선설과 성악설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통해 사회화 과정을 배우고 적응된 우리들에게는 니체의 양심의 가책 정의가 잘 통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또한 도덕이나 사회화에 대해 전혀 배우지 않은 백지 상태의 아이를 관찰하면 니체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들을 볼 때 두 가지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이나 물건을 실수로 죽였을 때(망가트렸을 때) 어린아이들은 자신에 의해 그 생명체가 죽었음을 인지하고 슬픔과 죄책감을 느낀다. 이는 부모나 다른 외부적 환경이 아이에게 죄의식을 느끼라고 시켜서 행해진 것도 아니며, 그가 자신이 동물을 죽이면서 느낀 잔인함을 자기 자신에게 내면화하여 얻어진 결과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느껴진다. 한편, 어떠한 아이들은 개미를 밟아 죽이고, 풀을 단지 재미로 뜯으며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 또한 그 생명체에게 고통을 주고 그 고통을 부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본능은 이러한 성선설과 성악설에서의 부분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앞서 들었던 두 예시의 사례를 순수한 아이들을 찾아보면 두 사례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것 처럼 인간 또한 니체가 말한 고통의 내면화 과정에서 생겨난 양심의 가책과 인간의 본유적인 특성에 의한 양심의 가책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의 “양심의 가책”이 생긴 이유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기는 하나, 양심의 가책을 그런 이유에서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이 추악하고 악독한 존재로 보여 자격은 없지만 인간 본연의 특성에 대해 감히 어느 정도의 변호를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