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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철이] Lec 16 - 무지에의 호소 오류, 상대주의(회의주의), 자유주의, 객관주의

[과철이] Lec 16 - 무지에의 호소 오류, 상대주의(회의주의), 자유주의, 객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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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김영 교수님의 과학의 철학적 이해 23-2 의 Lecture note 입니다.

논리적 탐구 : 무지에의 호소 오류

무지에의 호소(appeal to ignorance) 오류

  • UFO는 존재하는가? UFO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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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시 : UFO 음모론자인 A.

    UFO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 해 봐라.(입증의 부담을 떠넘기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귀신이나 영혼과 같은 것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과학이 밝히기 전까지는 그런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지 않은가.

    UFO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 UFO는 존재한다. 즉 P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P이다 라는 논지.

P에 대한 우리의 지식 상태를 전제로 P 자체를 판단하는 것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알거나 모른다고 하여서 그 자체를 판단하는 것을 무지에의 호소오류라고 함.

무지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모른다” 즉 무지 뿐이다.

무지에의 호소 오류는 연역논리적인 오류이다. (전제와 결론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오류가 자주 문제가 되는 상황은, 앞의 UFO 사례처럼 다른사람에게 입증의 부담을 슬쩍 떠넘기려고 할 때이다.

합리성의 일반적 기준 (주장하는 사람은 그 주장을 입증할 부담(책임)을 지는 것. 주장을 입장하는 근거를 스스로 제시해야 한다) 를 위반하는 것.

입증의 부담은 그 사람에게 있는데, 입증의 부담이 있는 사람이 무지에 호소하면서 입증의 부담을 떠넘기는 것도 무지에의 호소 오류에 해당한다.

내가 UFO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의 입증 부담은 나에게 있는 것인가? : 그렇지 않다.

내가 저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은 UFO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UFO라는 개념, 말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내가 먼저 나서서 UFO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의 부정에 대한 주장은, 존재 주장이 먼저 있었기에 그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므로, 입증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마녀 사냥의 예시 : 네가 마녀가 아닌 것을 증명하라는 것은 입증 부담을 떠넘기는 것.
  •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증명하라는 것도 이와 같음.

이런 상황에서 입증의 부담을 받는다면 나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가?

주장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not P를 증명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not P란 P의 여집합적 성격을 가지므로, 원리적으로 P를 제외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확실히 확인해 가며, 완전히 정합적으로 맞춰보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

  • 과거 군사정권 시절 “간첩단” 조작사건들. 간첩이 아님을 밝히는 식으로 수사를 진행 후 북한과 관련이 없다는 결정적 증거가 없으므로 간첩이다고 판결.

입증의 부담을 떠넘길 수 있다면 거의 모든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 : 입증의 부담은 그 주장을 제기하는 쪽에 있어야 한다는 법칙

실제로 무죄 추정의 원칙은 부족한데, 사람들이 자꾸 입증의 부담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억울하니까.)

입증의 부담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묵비권. (진술거부권)

무지에의 호소 오류가 오류가 아니라면 (입증의 부담을 떠넘길 수 있다면,) 사회는 해체, 붕괴 되어 정글이 될 것이다.

모든 것(진리, 도덕, 범죄) 등이 힘, 힘의 논리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

논리가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진다.

  • 생물학을 뒤져 보아도 죽음의 불가피성을 암시하는 대목이 한 군데도 없다. → 그러므로 언젠가 보편적 질병, 인간 육체의 유한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극복할 날이 올거라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죽음이 불가피함을 모르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음) → 으로부터 죽음이 불가피하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음.

  • 6명의 장님(과학자)가 코끼리를 탐구하는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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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리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들은 잠정적 최선의 결론 : “꼬리는 발견되지 않은 생물”이다.

일반적 회의주의자들은 인간의 모든 인식과 주장에는 미지의 부분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며, 언제나 새로운 관점,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전제로부터 코끼리에 대한 인식이 오류라는 주장을 함. (미지의 부분이 있다는 그 존재를 회의주의자들이 증명해야만 함)

  1. 새로운 관점과 미지의 영역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른다’라는 것 뿐이다. (무지로부터 어떤 것의 존재를 주장할 수 없다)

    회의주의자들은 모른다는 무지에 근거하여 모르는 것이라는 “존재”를 주장하므로 이는 오류이다.

  2.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회의주의자에게 입증의 부담이 있다.

    새로운 관점이나 미지의 영역이 더 없다고 증명되지 않는 이상 어떠한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증의 부담을 떠넘기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영역이 존재할 가능성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3. 가능성으로 후퇴하는 것도 회의주의를 구할 수 없다.
    • 달걀은 잠재적인 닭이다. 그러나 달걀이 닭의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가능성 만으로 대상의 현재 속성을 규정할 수 없다.

    꼬리 없는 코끼리에 대한 (미지의 영역에 대한) 새로운 관점 이 존재할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하나, 이 가능성으로부터 현재 인식의 속성을 규정할 수 없다.

  4. 미지 영역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회의주의자가 실제로 그러한 영역 (“코끼리의 꼬리”)를 발견한 경우?

    실제로 회의주의자가 달성한 것은 “인간의 모든 인식은 어차피 오류”라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객관성 증진을 향한 탐구에 참여하여 매우 중대한 기여와 공헌을 한 것이 됨

일반적 회의주의는 ’무지에의 호소 오류’를 저지르는 등 지지 불가능한 입장이며 오직 구체적 회의주의만이 타당하다.

과학은 구체적 의심과 회의를 통해 이전보다 더 나은 인식을 향해 발전하게 된다.

즉 어떤 주장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는 것은 그냥 의심하고 반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해 우리가 인식의 객관성을 증진하고, 이전보다 더 나은 인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이다.

  • 일반적 회의주의 : 일반적으로(원리적으로) 의심을 제기하고 오류일 수 밖에 없는 태도

    구체적 회의주의 : 어떤 주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련 증거, 논리 등을 문제 삼으며) 의심(의문)을 제기하는 것.

과학에서 말하는 조직적 회의주의는 일반적 회의주의가 아닌 구체적 회의주의를 의미한다.

상대주의(회의주의)와 오류가능주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이고, 가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견해에 공정히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함.

오류가능주의에 의해 상대주의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함.

오류가능주의는 상대주의(회의주의)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이로부터 상대주의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오류를 저지른다는 점에서

  1. 오류가 아닌 진리(truth)가 객관적으로 존재함을 의미
  2. 우리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무엇이 오류인지, 무엇이 진리고 그렇지 않은지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함.

오류 가능성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객관주의의 근거가 된다.

상대주의와 자유주의

자유주의, 관용의 덕이 상대주의나 도덕적 회의주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된다.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허용하므로 그러나 도덕적 회의주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님.

자유주의 사회는 어떤 가치관도 다른 것보다도 낫지 않다는 회의주의의 주장이 아닌, 자유와 관용의 가치를 강하게 내세우는 사회이다.

자유주의는 특정한 가치(자유와 관용의 가치)가 다른 것 보다 객관적으로 더 나은 가치라고 주장함

자유주의는 모든 가치가 상대적인 것이 아닌, 자유의 가치가 다른 가치들보다 낫다고 객관적으로 우선성을 가진다고 주장. 객관주의를 지향하며,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와는 반대의 입장임.

왜 자유의 가치가 객관적으로 우선성을 가지는가?

사회공동체와 우리의 삶이 유의미하게 존속/발전할 필수조건

  1.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추구
  2. 끊임 없는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창조성(creativity) 의 계발과 발현.

자유라는 가치가 이 두가지를 가능케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필수 불가결의 조건.

  • Free speech가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언론의 자유의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견해들이 동등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free speech를 보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올바른 견해(진실,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가장 올바른 방법이 free speech이므로.

적어도 지금보다는 (객관성이나 진실성)이 향상된 인식이나 의견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

다양한 의견들이 동시에 주장되고 있는 상태에 만족하기 위한 것이 아님 (언론의 자유를 위한 언론의 자유, 맹목적 언론의 자유) 는 가치론적 혼동임.

진리를 받아들여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것.

  • 소통의 목적은 무엇인가?

각자의 생각을 소통하기 위해, 각자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하기 위해서 (무의미함. 소통을 위한 소통). 상대주의자 입장에서는 그저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에 불가능할 것이다.

각자의 인식, 의견, 주장, 감정을 주고받으며 무언가 하나의 것(공통의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다.

진리와 실용주의

‘진리’라는 개념 자체가 어떠한 인간의 노력에도 도달할 수 없으므로 진리를 아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리를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보기 쉬워짐.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 진리이다)

실용주의는 상대주의를 벗어나기 어렵다. “진리”라는 개념이 폐기되고, 유용성이라는 개념만 남게 됨.

실용주의 : 좋은게 좋은 것이다. → 이러한 판단 자체는 사후적일 수밖에 없음. 어떤 것이 좋은지 안좋은지는 처음부터 알 수 없기 때문.

어떤 것이 사전에 유용한지 판단하려면 유용성의 개념을 넘어서는 제 3의 기준이 필요하다.

실용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진리의 개념이 필요함.

진리는 경험세계속에서 확인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저 형이상학적 개념일 뿐이다. (상대주의자, 실용주의자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므로 무의미하다고 주장)

그러나 진리라는 개념은 우리의 탐구, 실행과정을 실제로 규제(regulte)하고,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다.

  • 우리는 정확한 6mm의 길이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 것을 알아볼 수는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6mm를 찾기 위해 점점 오차범위를 줄여나감.

    실제로 정확한 6mm를 만들어 적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것이 적중했다고 말할 수 없다. (알 수 없다)

    6mm의 길이는 객관적으로 실제하나, exact 6mm의 길이를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이는 형이상학적 개념)

    그러나 오차범위를 줄여나가는 방법으로 정확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를 통해 이전의 오류를 알아차릴 수 있다. (정확성을 객관적으로 증진해 나가는 것은 가능.)

    즉 이전 보다 더 truth에 다가가는 지식의 진보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 하여도 우리가 정확한 6.0mm에 도달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수많은 시도 중 우연히 정확한 6.0mm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truth에 실제로 도달할 수도 있는 것. (원리적 도달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상대주의/회의주의자들의 말과 다르게.)

    물론 그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뉴턴 법칙이 한 때는 참이었다가 거짓이 된 것이 아님. 보다 오차범위를 향상시킨 것.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통해 실제로 truth에 적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알 수는 없다.

진리는 마치 ’북극성’과 같다.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별이므로 객관적 실재성이 된다. 또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인도해주는 좌표 기준이 규제적 이념성이 되기도 한다.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면서(real) 하면서도 우리의 탐구를 규제하는 이념(ideal)이 된다.

  • 항해자들은 북극성을 기준으로 나아가나 북극성에 도달하려고 항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 도달하였더라도 우리는 북극성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과학자들도 truth를 이념적 기준으로 하지만, truth에 적중하는 것을 의식하거나 목적을 하여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주로 노력을 기울이며 진행하는 것은 ’오류를 통한 진보’이다.

오히려 이전의 것 보다 더 향상시키는 것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이다. (오류 발견 및 수정, 객관성 증진, 더 다산적 가설 고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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