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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철이] 중간고사 답안

[과철이] 중간고사 답안

문제 1

(1) 헬렌 켈러는 말하였습니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 쪽 문은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닫힌 문만 오래 바라보느라 우리에게 열린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 이 말의 가치론적인 함축을 논리적 관점에서 풀어서 설명해 보아요.(2.2점)

헬렌 켈러의 명언은, 자신의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다른, 혹은 더 나은 선택지들을 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삶의 깨달음’, 혹은 ‘현명해진다는 것’에 대한 전형적인 논리적 구조를 함축하는 명언이다. 여러 문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나 수단은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하다는 점을 알 수 있으며, 열린 문이 닫히고 닫힌 문이 열린다는 점에서 어떠한 목표의 달성이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고 시간의 흐름이나 개인의 상황에 따라 오히려 불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행복의 가변성을 암시한다. 또한 우리가 닫힌 문을 오래 바라보느라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는 구절에서는 근시안적 터널 비전에 빠져 주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안을 무시하고 닫혀버린 문인 원래의 목표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을 지적하고 있다. 수업 시간에 배운 연역논리적 사고 오류에 대한 교훈과, ‘내가 바라보는 문이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전제 자체의 오류 가능성의 측면에서 위 명언을 해석하여, 교훈과 올바른 가치론적인 선택을 하는 방법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우리 삶 속에서 빠질 수 있는 연역논리적 오류 중 가장 흔하고, 알아채기 어려운 것은 전건 부정의 오류이다. 전건 부정의 오류를 확인할 수 있는 단적인 예시로 많은 수험생들이 목표로 삼는 수능 시험을 생각해보자. 많은 경우에 수험생들은, ‘수능을 잘 보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생각보다는 ‘이번 수능은 잘 봐야 한다’ 라던가, ‘이번 수능을 못 보면 불행해질 것이다’와 같이 목표 달성에 실패했을 때 찾아올 것으로 예상되는 불행에 대한 걱정과 압박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비단 수능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원 진학 문제, 전공 시험, 심지어는 군대는 언제 갔다 올지,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 지와 같은 인생의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가지는 사고방식임을 알 수 있다. 바꾸어 표현하자면, 우리들은 속된 말로 ‘잘못 선택하면 인생 망한다’와 같은 생각을 선택의 순간에 보편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례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점은 목표를 달성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 불행해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전건 부정의 오류를 논리적 관점에서 해석해보면, 우리는 ‘P이면 Q이다’ 라는 명제에서 ‘not P이면 not Q이다’ 라는 사실을 도출하고, 이를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어떤 전제가 참이라고 해도 그 이(裏, inverse)가 항상 참이 아니라는 사실은 논리학적으로 자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앞서의 예시와 같이 삶 속에서 ‘P일 때 행복할 것이다’ 라는 전제로부터 ‘P가 아니라면 불행할 것이다’ 라는 명제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도출한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면 P 이외에 다른 선택지에 대한 시야가 좁아지고 해당 목표만을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전건 부정의 오류에 의해 유도되는 ‘터널 비전(tunnel vision)’ 효과는 자신이 원래 설정한 목표에만 몰두하고 집중한 나머지 다른 선택지나 대안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말한다. 앞서 언급한 전건 부정의 오류, 즉 ‘P이면 Q이다’로부터 ‘not P이면 not Q이다’ 라는 명제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실패에 대한 공포나 위험부담을 떠안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가지는 자연적인 보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전건 부정의 원리는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길이 옳은 길일 것이라는 군중 심리와 이미 투자한 비용이 아까워서 꼭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매몰비용의 오류로부터 귀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어찌 되었던 터널 비전의 사고방식에 빠진 사람은 불안감과 스트레스 속에서 다른 선택지를 고려하는 객관적 선택을 하기 어려워지게 된다. 헬렌 켈러의 명언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현재 목표로 하는 P 말고도 정말 많은 P, 즉 행복으로 이끌어 줄 다른 문들이 존재하며, 넓은 시야로 다른 대안을 찾아 행복의 열린 문을 찾으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역으로, 참이라고 생각하는 원래의 명제인 ‘P이면 Q이다’가 항상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항상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 진학에 꿈을 꾸는 학생들은 당연히 의사가 되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의사가 되기만 하면 평생 행복할 것 같지만 막상 불행하다고 느끼는 의사도 현실에 다수 존재하며, 막상 의사가 되어 보니 본인의 적성이 의사와 맞지 않거나 더 잘 맞는 적성을 찾는 등 여러 경우의 수가 존재할 수 있다. 목표를 달성했다고 반드시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직업을 선택하고 삶의 수많은 중요한 결정을 내린 연장자 혹은 현자들이 줄곧 강조하는 공통적 교훈들 중 하나이다. 헬렌 켈러의 명언 속 비유를 인용하면, 목표로 하고 나아가는 문이 항상 열려 있다는 보장은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문제 2

(2) 거짓말쟁이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는 <양치기 소년="">의 우화가 실제 현실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귀납 추론 및 인간 본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쉽게 풀어서 설명하여 보아요.(2.2점)

우리가 알고 있는 <양치기 소년="">의 우화는 양치기 소년이 3번씩이나 마을 사람들을 속이고 늑대가 나타났다고 말하여, 실제 늑대가 나타났음에도 마을 사람들이 양을 지키러 오지 않아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우화를 인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 라는 일차원적 교훈을 결론으로 하고 더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치기 소년=""> 우화는 마을 사람들이 2번씩이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용인한다는 점에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데, 이 부분을 고찰하며 인간의 귀납적 추론에서 나타나는 특성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양치기 소년=""> 우화에서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의 행동을 통해 그에 대한 귀납적인 추론을 하고 있다. 양치기 소년의 첫 번째, 두 번째 거짓말을 통해 '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 소년의 세 번째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마을 사람들의 이러한 귀납적 추론은 타당해 보이지만,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마을 사람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을 거의 찾을 수 없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마을 주민 중 한 명의 상황이 된다면 절대 두 번씩이나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하도록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양치기 소년에게 속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를 매우 혼내거나, 그의 월급을 감봉하는 등의 처벌을 내리는 것이 정당했을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정말 인내심이 넘치는 사람들이라 처음 저지른 잘못을 너그러이 넘어갔다고 해도 두 번째로 그의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마을 주민들은 적어도 양치기 소년을 해고하거나, 그에 준할 정도로 심한 벌을 내리는 것 현실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마을 주민들의 양치기 소년에 대한 대처가 우화속에서 일어난 이유는 우화 속 인물들이 인간이 가진 사회적 뇌의 편향적 사고를 고려하지 않고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귀납적 추론을 할 때 몇 번의 반복된 결과를 바탕으로 추론을 이끌어 내는지, 그 사례(경험 데이터)의 수효는 추론을 하는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귀납적 추론을 할 때는 다수의 공통된 결론을 가지는 사례를 통해 추론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귀납 추론의 결론을 신뢰하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반드시 많은 수의 사례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데, 심지어는 단 한 번의 관찰 만으로 귀납적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존재한다. 일례로, 뜨거운 주전자에 궁금증으로 손을 가져다 댄 아기는 한 번 내지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주전자가 위험한 사물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 의해 귀납적 추론의 사례 수효가 달라지는 것일까? 진화론적 측면에서 이 질문에 답변하면, 어떠한 대상의 위험한 정도가 크면 클 수록 대상을 위험하다고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사례의 수효는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의 존속에 위해를 가할 여지가 큰 대상에 대한 귀납적 결론을 내릴 때 다수의 사례가 필요한 생물이 있다면, 귀납적 결론을 위한 인내 과정에서 많은 개체가 죽거나 다치게 되어 그 종은 결국 멸종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환경에 잘 적응하여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생존에 위해가 될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해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이를 회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존에 직결되는 위협 요소에 대한 귀납적 추론의 필요 사례 수효는 그 위험성이 높으면 높을 수록 줄어들어야만 빠른 판단을 내려 환경에 적응하는데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양치기 소년 우화 속 마을 주민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는 근거는 마을 사람들의 행동에서 인간의 '귀납적 인내'에 대한 비대칭성이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에게 있어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요소는 야생동물도, 자연재해도 아닌 타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안정을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에 한 번의 배신이나 사회적 관계의 단절이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귀납적 판단의 대상이 인간에게 잠재적으로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타인이라면, 귀납적 추론을 위해 필요한 사례는 극단적으로 적어진다. 이를 인간의 귀납적 인내에 대한 비대칭성이라 한다. 양치기 소년의 우화에서 단 3번만에 소년이 거짓말쟁이라고 판단한 것조차 현실세계에 사는 우리가 보았을 때는 상식적이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귀납적 인내’의 비대칭성은 강력하게 작동한다. 백 번 잘 해도 한 번 잘못하면 소용없다는 격언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은 그 대상이 타인일 때는 ‘귀납적 인내’의 역치가 매우 낮게 책정된다. 타인을 판단함에 있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 보다는 '그럼 그렇지' 라는 확증 편향 내지는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타당하며 인간의 가장 큰 적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귀납적 인내의 비대칭성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문제 3 (3) Karl Popper의 반증주의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특히 Popper가 말하는 “좋은 과학 이론의 특징” 및 Popper의 “가짜 과학에 대한 비판”을 적용하여, 아래 맨큐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요.(2.8점) “기회비용이란 어떤 선택을 위해 포기했던 다른 선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이다. 대학 진학의 예와 같이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한 선택에 대한 기회비용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에 갈 나이가 된 운동선수 중에 프로에 입단하여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선수들은 이미 대학 진학의 기회비용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대학 진학의 비용이 이득에 비해 크다고 느낀다.”(그레고리 맨큐, 『맨큐의 경제학』 중에서) - 이 문제는 Popper가 말하는 “좋은 과학 이론의 특징” 및 Popper의 “가짜 과학에 대한 비판”을 설명하고 정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즉 Karl Popper의 반증주의 과학철학을 다시 정리하면서 서술할 필요는 없습니다. - Karl Popper의 반증주의 과학철학을 위 사례에 적용했을 때 어떤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인지 명확히 서술하면 됩니다. Karl Popper의 반증주의 철학에 입각하여 맨큐의 주장을 검토해 보면 그의 주장은 포퍼가 생각하는 좋은 과학이 아니며, 도리어 가짜 과학의 일종이다. 맨큐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사람의 행동은 기회비용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의사결정을 내릴 때 어느 한 결정을 선택하면, 선택되지 않는 다른 결정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심지어 선택의 기로에서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선택지를 선택하지 않는다' 라는 선택을 한 셈이다. 맨큐의 주장에 입각하면, 모든 결정이나 상황에서 선택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기회 비용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 결과가 성공적이라면 '기회비용을 잘 고려한 선택', 그렇지 않다면 '기회비용을 잘 못 고려한 선택(예컨대, 기회비용을 과소 혹은 과대평가한 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선택에 대해 맨큐의 기회비용의 관점에 입각하여 판단이 가능하다. 이는 칼 포퍼의 반증주의 과학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경험적인 내용이 없고 상상 가능한 모든 사건에 적용할 수 있는, 반박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가짜 과학 이론'이라는 것이다. 맨큐의 예시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프로에 입단하여 성공한 운동선수의 경우는 기회비용을 잘 고려하여 성공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운동을 좋아하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노력하여 명문대에 입학한 다른 학생이 있다면 프로 입단에 대한 기회 비용을 잘 추산하여 성공하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맨큐의 기회비용에 대한 주장은 가설을 입증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경우를 근거로 들 수는 있으나, 어떤 것을 '아니다'라고 제약하거나 금지하는 바가 전혀 없다. 금지하는 바가 전혀 없는 이론은 반증 자체가 불가능한, 반증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주장이다. 포퍼의 주장 대로라면 맨큐의 이론은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동일한 부류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 짓자면, 맨큐의 주장은 무수히 많은 사례들에 적용 가능하지만 각 사례들이 주는 경험적 교훈이나 함축이 전혀 없으며, 금지나 제약하는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아 반증가능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과학이론이 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속담 중 이러한 상황에 대한 통찰을 주는 속담이 하나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 문제 4 (4) 종종 “이 우주는 왜 탄생하였을까?” 또는 “이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지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풀어서 답변(설명, 해명)해 줄 수 있을까요? → 현생 인류가 진화하면서 가지게 된 본성, 일상 언어의 의미, 사실과 가치의 구분 등 수업을 통해 논의된 내용들을 모두 활용하여 (위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서술해 보아요.(3.2점) 철학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물음을 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물음이 던져진 배경과 그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왜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됐는지 인간만이 가진 인지 유동성의 범람으로 인한 낭만주의적 특성으로부터 그 원인을 먼저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이 과연 올바르게 구성된 질문인지 왜(why)라는 일상 언어의 중의적 특성에서 오는 혼동을 바탕으로 질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질문에 답변해보고자 한다. 인간은 같은 영장류인 침팬지와 유전자 구조가 1.6%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사회적 뇌를 가지고 의사소통과 정보 교환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고 문명을 이룩하였다. 유발 하라리는 이 작은 유전적 돌연변이가 현생인류의 뇌의 배선을 바꾸어 사회적 지능의 '범람'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인간이 인지 유동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지 유동성이란 우리가 가진 사회적 지능, 즉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읽는 마음의 눈이 타인 뿐만 아니라 인간을 제외한 자연물이나 인공물에도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지능이 원래의 적용 범위인 타인을 넘어 인간 이외의 대상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능이 범람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지 유동성은 해와 달, 산과 바다에 인격을 부여하고 인간적 상호작용이 가능하다고 믿게 만들었으며, 이는 사물이나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으로 귀결된다. 사물을 곧이곧대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유하는 상징 능력은 단순한 개념을 넘어 예술과 음악과 같은 문화의 창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형이상학과 수학의 기반이 되었다. 유발 하라리는 현생인류가 다른 동물과 다른 인류의 종을 밀어내고 다양한 지역과 환경에서도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로 인지 유동성을 들고 있다. 인지 유동성과 상징 능력을 가진 현생인류는 일반적인 동물의 사회적 집단 크기보다 훨씬 큰 대규모 결속을 통해 다른 동물이나, 호모 에렉투스나 네안데르탈렌시스와 같은 다른 인류에 비해 신체능력에서 열세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 지구적 번성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생인류는 자신의 생존에 직결된 문제를 본능적으로 해결하는 다른 동물들과는 구분되는, 낭만주의를 갖게 되었다. 이를 통해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나를 비롯하여 나를 둘러싼 주변 세계인 우주의 존재 의미를 묻게 된 것이다. '왜 이 우주가 탄생했는가', '이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의도는, 실제로 어떻게 우주가 탄생하였는지 그 방법론이나 과정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주가 어떤 의미인지, 우주 생성의 인간적 의도는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질문속의 'why', '왜'라는 단어는 우주의 탄생에 대한 인간적 의도나 목적에 대한 의구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질문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보면 how-question과 why-question으로 나눌 수 있다. how-question은 어떤 대상에 대한 설명이나 기술, 묘사를 요구하는 질문으로 사실관계를 입증하고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why-question은 당위성에 관한 것으로, 목적과 의도, 가치에 관한 판단을 물어보는 것이다. 즉 질문자가 던진 '우주가 왜 생겼는지'에 대한 질문은 우주가 생긴 원인이나 그 과정을 물어보는 사실에 대한 질문인 how-question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why-question을 묻고 있다는 것이다. 질문 속 '왜'라는 단어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라는 방법론적 질문을 할 때도 사용되고 인간적 의도나 목적을 물을 때에도 사용되는데, 이러한 혼용은 언어적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대체로 이러한 질문을 들었을 때 '어떻게 우주가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how-question에 대한 답변을 자주 들을 수 있지만, 인지 유동성과 인간의 낭만적 본성을 고려했을 때 질문의 진짜 의도는 '왜 우주가 만들어졌는지' 우주의 존재 목적과 가치에 대한 물음, 즉 why-question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how-question'적으로 답변하자면 빅뱅에 의해서, 한 점으로부터 폭발하였기 때문에 우주가 탄생했다는 과학적 답변을 제시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질문자가 진정으로 듣기를 원하는 답변이 아닐 것이다. why-question의 답변을 통해 우리는 우주 탄생의 의미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 탄생의 의미를 찾으면 그 목적과 의도 속에 나라는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연결 과정은 앞서 언급한 현생인류가 갖게 된 본성에 의한 것이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의 존재를 규명하거나 물질을 이루는 입자 하나하나가 인간적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규명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명쾌하게 답해줄 수 없을 것이다. ‘우주 탄생의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질문자의 근본적 의도에 부합하는 답변이 불가능하다는, 다소 허탈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주는 왜 탄생했을까'라는 질문의 가치는 인류가 이러한 질문을 왜 던지게 되었는지 생각하는 과정과, 무목적성의 우주 속에서 인간적 목적과 의도라는 의미론적 세계로 연결 짓는 과정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의도와 이러한 질문이 던져지는 과정에 대해 면밀히 이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본성과 그 의미부여에 관해 물어보고 있는 본래의 질문에 간접적인 답변을 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 문제 5 (5) 아래 논증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일까요? → 이 논증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상세히 분석·설명해 보아요.(2.6점) [전제]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자연적인(natural) 일이다. [결론] 그러므로 여성이라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적인(natural) 일이므로, 여성이라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논증은 분명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논증에서 사용하고 있는 '자연적인(natural)' 이라는 용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자세히 분석하여 왜 이 논증이 잘못되었고 어떤 근거로 자연주의의 오류가 포함되었다고 하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적인 일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자 그대로 이를 해석하였을 때 이 명제는 사실(fact) 진술이 맞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여성만이 아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여성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 진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사실 명제로부터 당위나 가치판단 진술을 도출해내는 것을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하는데, 여성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여성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귀결되지 않으므로 제시된 논증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사례이다. 또한 위 논증에서 사용된 '자연적인' 이라는 말에는 가치 판단이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성별이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남성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fact)은 분명 참이다. '자연스럽다'는 단어를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하면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진술은 가치 판단이 아닌 사실 진술로 보인다. 그러나 위 논증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연적인' 이라는 말에 긍정적인 일종의 가치론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가치론적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자연적인’이라는 단어와 ‘부자연스럽다’는 단어의 대비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므로 '자연적이지 않은(unnatural)' 선택을 한 여성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언뜻 보기에는 '자연적인(natural)'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이다, 평균적이다'라는 보편성의 입장에서 사실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표현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부자연스럽다'는 단어가 주는 가치판단적 뉘앙스로 인해 '자연스럽다'는 단어가 ‘마치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올바르다’는 의도로 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자연스럽다’는 단어와 ‘부자연스럽다’는 단어의 대비를 통해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옳은 일이다.’ 라는 가치 판단의 진술 암시적으로 문장에 표현된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원래의 전제와 결론 사이에 가치판단의 진술이 끼어 들어가 논리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하게 논리적 관점에서만 보았을 때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옳으므로, 여성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 라는 문장은 말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옳다.'는 전제가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는 사실명제로부터 유도될 수 없고 이는 참이 아니므로 올바른 논증이 아니다. 결론짓자면, 사실로부터 당위성이 귀결되지 않는다는 자연주의의 오류의 정의 측면에서, 그리고 '부자연적'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로 인해 발생하는 논리적 비약에 의해 위 논증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올바른 논증이라고 보기 어렵다. 특히 '자연적인'이라는 단어가 '부자연스럽다'는 단어와 대비되며 일종의 긍정의 의미(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오인되면서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옳기 때문에 여성은 아이를 낳아야 한다" 라는, 본래의 문장과는 다른 의미로 곡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문제 6 (6) “근대 과학(modern science)은 상식의 재교육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과학을 배우는 과정은 “상식을 재교육”하는 것으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 여러분들이 배워 온 과학의 사례들 중에서 “상식의 재교육”에 해당하는 사례를 한 가지 발굴하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상식의 재교육”에 해당하는지 설명해 보아요.(2.4점) - 여러분들이 발굴한 사례가 교육 과정이 낮은 단계에 속할수록 좋은 평가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초등 교육 과정의 사례가 고등 교육 과정의 사례보다 높은 득점이 기대된다는 말입니다. [유의] 강의 및 강의 자료를 통해 제시된 사례들은 제외하여요. : 강의를 통해 제시된 사례를 반복한다면 감점의 위험이 있어요. 상식의 재교육의 좋은 예시로 "무거운 물체는 가라앉는다"는 경험적 진술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논증을 하나의 용어로 축약하여 '부력의 법칙' 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이 사례는 '부력' 개념의 설명 없이도 초등 과학 수준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물에 뜨고 가라앉는다는 개념이 어떤 교육과정에 포함되는지 찾아보았는데 '부력'이라는 힘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중학교 1학년 과학에서 처음 등장하고, 물에 뜨는 물체와 뜨지 않는 물체에 대한 설명과 실험은 초등 고학년 과학 교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례에서는 굳이 부력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도 상식의 재교육을 설명할 수 있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초등 교육과정에서의 상식의 재교육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상식과 직관에 따르면 무거운 물체는 물에 가라앉고 가벼운 물체는 물에 뜬다. 이러한 진술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다른 조건을 모두 동일하게 맞추었을 때 같은 모양의 나무막대기와 쇠덩어리를 물에 넣으면 나무막대기는 뜨고 쇠덩어리는 가라앉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식과 직관에 대한 반례를 의외로 쉽게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강철로 만들어진 무거운 배는 물 위를 보란듯이 떠다니기도 하고, 1g밖에 되지 않는 쇠구슬은 물에 가라앉는다. 이 반례들은 ‘물체가 무거우면 가라앉고, 가벼우면 뜬다’는 상식과는 다르게 물체가 뜨고 가라앉는 데에는 무게 이외의 다른 요인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부력이라는 개념의 도입 없이도 "무거운 물체는 가라앉는다"는 명제에 대한 상식의 재교육을 초등 교육과정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조선해양공학과를 재학하며 배운 부력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첨언하자면, 물체의 무게가 물체가 물에 뜰지 가라앉을지를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물체의 무게가 곧바로 뜨고 가라앉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추가적인 고려 사항이 포함되어야 한다. 물체가 뜨려면 물체의 무게(지구가 끌어당기는 힘)과 동일한 힘으로 물이 그 물체를 밀어줘야 하는데(부력), 이 부력은 물체가 물 속에 잠긴 부피에만 영향을 받는 요소이다. 물에 잠긴 부피는 그 물체의 형상, 밀도 분포와 같은 물체의 재료적 특성에 의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동일한 물체라도 재료적 특성이 달라짐에 따라 어떤 물체는 물 위를 뜨고 어떤 물체는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결론짓자면 "물체의 무게만이 물에 뜨고 가라앉음을 결정짓는다"는 진술은 거짓이고, "물체의 무게와 재료적 특성이 종합하여 물에 뜨고 가라앉음을 결정짓는다"는 추가적인 요소가 고려되었을 때 진술은 비로소 참이 된다. ### 문제 7 (7)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성’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 왜 그렇게 까다로웠는지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보아요.(2.0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관성'의 개념에 도달하기까지는 수많은 상식의 재교육이 필요했다. 고대와 중세의 역학에서 ‘모든 운동은 어떠한 원인에 의해 촉발된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사람들의 인식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당시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질료인, 형상인, 운동인, 목적인), 즉 모든 자연현상에는 그 원인이 있다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는데, 그 중 물체의 운동은 운동의 원인이 되는 운동인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모든 사건에는 인간적 목적이나 의도가 숨어있어야 한다는 인간의 인지 유동성과 낭만적 본성과도 잘 부합하였기에 오랜 기간동안 큰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사람이 직접 힘을 주어 물체를 밀면 그 힘에 의해서 물체는 운동을 시작한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물체는 원래의 상태인 정지상태로 돌아간다. 물체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는 정지 상태이며, 힘을 받았을 때 물체는 운동을 시작하고, 물체가 힘을 받지 못하면 다시 원래의 상태인 정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체의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위와 같은 답변이 오랫동안 수용되었던 이유는 단순히 사람들의 상식에 부합하고 이론이 실제 물체의 운동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을 깨고 '관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우리가 물체의 운동에 대해 던지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관성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움직이는 물체를 정지시키는가?"라는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무엇이 물체를 계속 운동하게 하는가?" (혹은 "어떤 원인이 물체의 운동에 관여하는가")라는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었기에 쉽사리 관성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과학적 함축은, '물체가 정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상식이 관성의 발견과 역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초등, 중등 교육을 통해 알고 있듯 운동은 힘이라는 원인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운동은 일종의 상태로, 힘은 물체의 형상과 운동 상태만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특히 과학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는 마찰력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웠고 마찰력을 알지 못하므로 물체가 힘을 받지 않게 되면 자연스레 정지하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 현실 세계는 '관성'의 개념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이상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현실 세계에서 관성의 효과를 아예 관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버스가 급속도로 가속하거나 브레이크를 밟으면 몸이 앞뒤로 쏠리는 현상이 물체의 운동상태를 유지하려는 특성인 관성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좌표계를 보통 '관성 좌표계' 라고 부르는데, 이는 모든 위치에서 관성의 작용이 균질하게 작용하는 세계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혹은 알더라도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없는 많은 힘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관성운동을 절대 관측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관성운동은 물리적으로 이상적인 관념이며 실제로 완벽히 재현될 수 없다. 이상 세계에서만 완벽히 재현가능한 관념인 관성이 현실 세계의 실제 운동과 완벽히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성 개념이 제시되고 수용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볼 수 있겠다. ### 문제 8 (8) ‘자연주의의 오류’나 ‘무지에의 호소 오류’와 같은 논리적 오류를 용인(허용)하는 사회 공동체가 있다면, 그 사회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이 두 가지 오류를 각각의 경우로 나누어서 설명해 보아요.(2.4점) '자연주의의 오류'와 '무지에의 호소오류(appeal to ignorance)'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범할 수 있는 논리적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들을 사회적으로 용인하게 되면 사회를 구성하는 논리가 무너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붕괴를 야기하게 될 것이다. 자연주의의 오류와 무지에의 호소 오류가 무엇인지 강의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어떤 근거에서 이러한 논리적 오류들이 잘못되었고 사회 공동체 적인 차원에서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자연주의의 오류는 연역논리적 오류의 일종으로,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전제로부터 당위성이나 가치 판단 명제를 결론으로 도출하는 추론을 의미한다. 이러한 오류가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불러지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사실로부터 어떠한 가치나 당위성을 도출해내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주의의 오류를 사회에서 용인하게 되면, 우리가 하는 어떠한 판단과 행동도 자연주의의 원리를 이용하여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역으로 어떠한 당위나 가치에 대해서도 사실 명제를 이용해 정당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를 구성하는 논리, 규범, 법과 도덕이 모두 무용해지고, 인간 사회가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자연주의의 오류를 사회에서 수용하였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예시를 통해 살펴보자. 만일 자연주의의 오류가 용인될 때 어떤 성범죄자가 자신의 범죄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고 해보자. 모든 사람이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성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러한 욕망의 실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범죄는 잘못이 될 수 없다는 가치 판단 명제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자연주의의 오류를 용인했으므로 해당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이러한 논리라면 법과 사회 질서는 지킬 필요가 없어진다. 자연주의의 오류를 용인하면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연주의의 오류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쉽게 수긍할 수 있지만, 자연주의의 오류가 실생활에서 범해지는 이유는 그만큼 자연스럽기 때문에 다른 말들에 섞여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무지에의 호소 오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 상태를 바탕으로 그 대상을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UFO 음모론자는 UFO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UFO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UFO의 존재성에 대한 무지로부터 UFO의 존재성에 대한 명제를 도출해낸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무지에의 호소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무지함 그 자체 말고는 없다. 이는 동어 반복적이며 어떠한 논리적 의미를 가진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또한 무지에의 호소 오류는 입증의 부담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입증의 책임은 어떠한 것의 존재성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지 그 존재성을 반박하는 사람은 입증의 책임이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것의 존재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애초에 그 주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존재성에 반박을 할 일도 없기에 입증 책임은 그 존재성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부여되어야 한다. 또한 존재성을 입증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입증 부담의 크기의 측면에서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UFO의 예시에서 UFO의 존재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UFO만을 제대로 관측하면 존재성이 증명된다. 그러나 UFO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단 하나의 UFO가 관측되지 않음을 보여야 하며 모든 UFO 목격에 대한 주장을 타당한 근거를 들어 반박해야만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증명은 여집합적 성격을 가지므로 존재성 증명에 비해 훨씬 난이도가 높으며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이유에서 여전히 지구 평면설과 같은 비상식적인 이론들이 여전히 지지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무지에의 호소 오류가 사회에서 용인될 경우 사회는 결과적으로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사회는 붕괴되어 정글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무지에의 호소 오류를 이용하여 잘못이나 범죄 행위에 대한 입증의 부담을 약자에게 떠넘기고, 증명하지 못한다면 이를 근거로 처벌을 가하여 강자의 권력을 축적하고 약자를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정치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간첩이 아님을 증명하라'는 식으로 수사를 진행하여 이를 소명하지 못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잡아들인 사례처럼, 무지에의 호소 오류를 용인하면 사회는 결국 강자가 독식하는 정글과 다를 바 없는 무법지대로 바뀌게 될 것이다. ### 문제 9 (9)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이성과 감정을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보면서, 인간을 타락시킨 이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를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modernist들(근대 합리주의자들, 과학자들)은 보다 합리적인 사회(인간적인 사회)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통해 감정을 철저히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두 가지 입장 중에서 어느 쪽이 타당한 것일까요? 아니면 두 입장 모두 잘못된 것일까요? 감정과 이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 가면서 답을 해 보아요.(2.6점) 19세기, 과학의 발전에 따라 기계론적 세계관과 결정론 등이 대두되자, 이러한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반발하는 낭만주의가 대두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물질론 적 세계관과 결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의지, 도덕이나 윤리, 감정이 모두 부정되고, 창조성과 상상력조차 존재할 여지가 없어 예술 마저도 부정 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소설에서 알 수 있듯 과학에 대한 무조건적 공포와 부정적 감정이 조성되기도 하였고, 다시 문명이 없었던 원시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히피 운동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반대로 이 시대의 근대 합리주의자들은 감정과 같이 충동적이고, 동물적인 본성은 이성에 의해 제어되어야 하며, 오직 이성과 합리성만이 더 나은 사회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당시 낭만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은 이성과 감정을 배타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실제로 이성과 감정은 분리 가능하거나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며, 이성과 감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인간 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반발적 사조로부터, 이성과 합리성을 대표하는 과학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예술을 상상력과 창의성, 그리고 인간의 낭만주의적 본성의 정수라고 여겼다. 철저한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에 의해 합리성과 이성을 추구하는 과학과, 감정과 낭만에 근간을 둔 예술이 배타적이고 대립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사고와 행동 과정을 고찰해 보면 우리가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의 준거의 많은 부분들은 감정에서 비롯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성이란 본질적으로 어떠한 목적이나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그 결과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를 따지는 능력을 일컫는다. 즉 이성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그 목적을 추구하고 달성하는지에 대한 방법론과, 그 행동을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가능한 결과 그 보상이나 가치를 따지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물건이 엄청나게 많은 백화점에서 물건 하나만 선택하여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장 먹고 싶은 음식이나 입고 싶은 옷이 눈 앞에 있더라도 그 백화점에서 가장 비싼 물건을 찾아 그것을 고를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성적으로 따져서 행동하라고 말할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자신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눈앞의 음식이나 물건을 고르는 것이 감정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여 가장 비싼 물건을 고르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가장 비싼 물건을 골라 돈이라는 재화를 얻는 것이 눈앞의 음식을 고르는 것 보다 훨씬 더 좋다, 즉 더 큰 행복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장 비싼 물건을 고르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을 통해 더 큰 행복을 주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고, 이는 감정이라는 판단 근거에 의해 선택한 것이다. 이성적 판단과 생각의 기저에는 감정이 숨어있다는 근거는 비단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물질적 선택의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 관계에서나 복잡한 관계들이 얽힌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결정을 내릴 때에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여기에서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판단 근거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신의 감정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감정과 이성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이성의 판단 근거, 그리고 이성적으로 따져 도달하는 목표가 결국 감정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이성의 판단기준이자 이성적으로 따지는 것의 목표가 되지만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얻어지는 분위기, 기분만을 감정이라 생각한다. 이성적인 판단속에 감정이 판단 근거와 목표로서 포함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로부터 순수한 이성이 존재하지 않고 이성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감정만으로 이성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성이라는 따지고 판단하는 능력의 판단기준이자 목표가 감정일 뿐이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이나 합리주의자들과 같이 감정이나 이성 중 하나의 개념 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성과 관점은 항상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양립 가능하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명제의 참이나 가설을 따지는 등의 이성적 탐구 과정, 특히 명제의 참과 거짓만을 따지는 논리학에서는 이성에서 감정이 배제되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허나 특정한 이성적 판단에서 감정이 그 근거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로부터 감정의 무가치성이나, 이성을 통해 감정을 제어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도출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더 좋은 감정, 우선적으로 바라는 감정 상태로 가기 위해서 합리적으로 따지고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반대로 감정은 이성적 판단의 근거이자 인간이 설정하고 따라가는 목표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성 없이 감정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이성적 사고를 가지지 않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구 드러내지 않듯이 이성은 부적절한 감정들이 표출되는 것을 통제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배타적이고 대립되는 것처럼 인식되어 온 감정과 이성이라는 관념은, 실은 상보적이고 서로의 목적과 수단이 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 문제 10 (10) ‘장님과 코끼리’ 우화에서 우화 작가가 인간 본성에 대해 왜곡해 놓은 점(또는 무시한 점)은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로부터 ‘인식적 관점의 다양성’이 ‘인간 인식에 대한 상대주의’(또는 회의주의)로 귀결되는지 논의하여 보아요. 여기에는 상대주의의 인간관에 대한 간략한 논의도 포함되도록 합니다.(2.0점) '장님과 코끼리' 우화에서 코끼리의 서로 다른 부위를 만진 장님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큰 소리로 오래오래 다투었다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이 우화를 읽으면서 현실과의 괴리감 을 느끼는데, 이는 단순히 우화이기 때문에 느끼는 위화감이 아니라 작가가 장님들의 행동을 묘사할 때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정보를 교환한다’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각각의 장님들은 자신이 만진 것 만을 옳다고 주장하고 타인의 의견을 듣지도 않는데, 서로 정보나 의견을 교환하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는 이 대화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사소통이라 보기는 무리가 있다. 인간은 의사소통의 존재이며 타인과 정보를 교환하며 살아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과학적 발견을 하고, 문명을 이룩하였다. 비단 과학만이 아니라 음악과 미술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가 달성한 대부분의 위대한 업적들은 개개인의 인간 혼자서는 절대 달성할 수 없을 것들이다. 이러한 문명의 이룩은 많은 사람들이 같은 가치관과 목표를 공유하며 의사소통과 정보 교환을 통해 함께 이루어 낸 것으로, 한 명의 인간이 가지는 특성만으로 인류 문명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는 마치 한 마리의 개미로 ‘개미집을 짓고 먹이를 찾기 위해 무리 지어 탐험하고 번성한다’는 개미의 본질적 특성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특성만으로는 인류의 문명과 그 업적들을 설명하기 어렵지만,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정보 교환을 통해 발전시킨 미미한 정보들이 전체 네트워크속에서 누적된 것으로 인간이 알아낸 세계에 대한 방대한 정보들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 고유의 본질은 사회성과 의사소통에 있다.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인간이 정의되고, 그 속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인간성을 발전시켜 나간다. 100명이 내는 100개의 서로 다른 의견들은 의사소통과 토론의 과정을 통해 참과 거짓을 판별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내며 진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의견으로 정합 되게 된다. 한편 상대주의자들은 인간의 인식이 관점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으며, 각자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일 뿐 어떠한 관점이 더 객관적이거나 더 올바른 지를 따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식 관점의 다양성은 인간 인식에 대한 상대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사물과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는데, 이는 인간이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의 인식을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님과 코끼리' 우화의 장님들처럼 타인의 의견을 듣지 않고 각자의 의견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다른 관점에서의 다양한 인식들을 인정하고, 종합하여 그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결론짓자면, 인간 인식의 관점의 다양성으로부터 '각 관점은 객관성에 있어 동등하다.', '어떤 관점이 더 객관적인지 알 수 없다' 등의 상대주의적 결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인식의 관점의 다양성이 상대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근거로 상대주의적 인간관의 오류성을 들 수 있다. 각자의 의견은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상대주의적 관점 속에 인간의 사회적 본질인 의사소통이 포함될 여지는 없다. 상대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된다면 서로의 관점 중에 더 나은 것이 없고 모두 존중해야 하기에 '장님과 코끼리' 우화처럼 코끼리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즉 상대주의적 인간관은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의사소통에 대한 고려가 모두 배제되었기에 개인의 의견이 개선되거나 변화될 여지없이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인 의사소통을 배제한, 개인의 인간관만을 고려하고 존중하는 상대주의를 올바른 견해라 볼 수 없다. ### 문제 11 (11) 인간의 오류가능성이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해 보아요.(1.6점) 상대주의자들은 인간의 오류가능성을 상대주의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그들의 논지는, 모든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모든 의견은 오류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모든 의견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오류를 범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모든 의견이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혹은 ‘올바른 의견이나 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상대주의나 회의주의가 주장하는 바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되려 인간의 오류가능주의는 객관주의의 근거가 된다. 우리 인간은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이 존재하고, 실제로 저지른다. 인간의 오류 가능성을 상대주의나 회의주의가 받아들이면 생기는 모순성을 2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중 첫번째는 오류의 존재를 받아들임으로부터 진정한 진리, 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출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는 순간 '오류'라는 개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 되는데, 오류는 정답 혹은 진리로부터 벗어난 틀린 답이라는 것을 의미하므로 진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함을 인정하는 셈이다. 즉 객관적 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회의주의의 주장은 모순이 된다. 둘째로 오류가능성은 어떤 주장이 오류를 가졌고 어떤 주장이 그렇지 않은 지 비교를 통해 분별할 수 있음을 함의하고 있다. 상대주의에서 오류가능성을 받아들이면 서로 다른 주장끼리 기준에 빗대어 비교하고, 진리와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상대주의에서 모든 주장은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므로 비교되거나 우열을 가릴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오류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류가 있는 주장과 그렇지 않은 주장을 구분하고, 이를 비교하여 어떤 의견이 더 우위에 있는지를 가릴 수도 있게 된다. 이는 상대주의의 원래 주장과는 상반되는 모순을 이끌어낸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오류가능성은 객관적 진리의 존재성과 진리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제시하므로 오류가능성이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의 근거가 되지 않고 오히려 두 견해의 모순성을 드러낸다. ### 문제 12 (12) 다음은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A와 B의 토론입니다. A : 수많은 문화적 갈등과 충돌은 문화가 상대적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을 잘 이해하고 문화가 상대적이란 점을 받아들인다면, 그와 같은 갈등과 충돌은 발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B :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문화상대주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에 어긋나는 것 아닐까요? 즉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당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 아닐까요? A : 물론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입장은 간단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문화상대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다양하고 상이한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고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문화상대주의는 모든 문화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최소한의 보편적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받아들인다면 수많은 갈등과 충돌을 막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요? → 여기에서 펼쳐지고 있는 A의 생각과 주장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관련된 여러 논점들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논의해 보아요.(4.0점) A와 B의 토론 속에서 A는 문화 상대주의를 내세우며, 모든 문화가 상대적이란 점을 받아들인다면 수많은 갈등과 충돌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B는 타인에게 문화상대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어긋나는 것이라는 반박을 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A의 변론은, 문화상대주의 하나만을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최소한의 보편적 규범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상대주의 하나만을 예외로 두는 순간 그 예외로 인해 문화 상대주의의 주장이 모순성을 가지게 되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을 확인할 수 있다. A는 문화상대주의 하나만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문화상대주의의 정의인 "모든 주장이 상대적이다"라는 문구에 포함시켜 다시 써보면 A의 주장은 "모든 주장이 상대적이라는 주장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로 정리될 수 있다. 이 주장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어야 한다’는 문화상대주의의 반례가 되어버린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규칙 자체가 절대적 규칙이라는 문장 속에서 자기 부정의 모순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A가 "문화상대주의를 수용함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용하면 안 되겠느냐" 라고 다시 반박할 경우에도 모순성에 빠지게 된다. '문화 상대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상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문화상대주의를 수용해서는 안된다' 라는 부정의 의견도 상대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문화상대주의를 상대적으로 받아들이면 문화상대주의를 부정하는 의견조차 받아들여야 하는 자기 부정의 역설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애초에 문화상대주의라는 주장 자체가 문화상대주의의 주장의 대상에 포함되므로 단 하나의 예외를 두는 식의 꼼수로는 자기지시의 역설에 의한 자기부정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A의 주장은 문화상대주의의 수용에 관한 주장이며, 문화상대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모순성을 띈다는 사실을 위 논증을 통해 설명했다. '문화상대주의를 수용하냐 하지 않냐'라는 의견의 수용에 대한 논쟁을 완전히 배제한다 하더라도 문화상대주의를 구성하는 내부의 논리만으로 모순성을 발견할 수 있다. 문화상대주의의 주장인 '모든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각 문화 간의 차이가 존재하므로, 각 문화는 반드시 개개의 맥락 안에서만(즉 그 문화 내부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각 문화마다 '옳다고 믿어지는 것', 더 세부적으로는 그들이 믿는 도덕이나 가치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서로 옳다고 믿는 것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올바른 정답의 존재성은 부정되지 않는다. '차이'라는 것은 결국 어떠한 기준이나 잣대가 될 제3의 대상이 있을 때 에서야 비로소 정의되고 분별 가능해진다.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문화 간의 공통적인 부분과 상이한 부분을 골라낼 수 있게 된다. 즉 상대주의는 문화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문화들 간에 비교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문화 간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이 올바르고 진리에 가까운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므로 문화상대주의의 본질적 주장과 모순된다. 문화 상대주의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타당한 결론은, 객관적인 가치나 의미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적 결론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문화 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문화 상대주의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되려 문화상대주의 자체를 반박하는 모순적 결과로 이어진다. 추가로 문화 간에 비교가 아예 불가능하거나 공통적인 부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념 상대주의적인 측면의 주장이 제기된다면, 이 또한 논리의 모순성을 지적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속하지 않은 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비교도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적 주장을 한다면, 개인이 속한 문화 이외의 다른 문화를 인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문화만을 이해하고 수용할 뿐 문화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해야 한다. 불가지론적 측면에서 개념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 간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성의 관점에서 존중하여야 한다는 문화상대주의의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이 또한 문화 상대주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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