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철이] 기말고사 답안
문제 1
(1) 과학(modern science)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 이와 관련하여 강의를 통해 논의되었던 내용들이 모두 포괄될 수 있도록 종합적으로 정리·서술하여 보아요.(14.0점)
- 기본으로 포함되어야 할 내용들이 상당히 많으니 강의 콘텐츠 전체를 차근히 검토하여 보도록 합니다. 예를 들면 과학이 우리의 자기 이해 및 자기 규정에 끼친 영향, 과학의 가치론적인 함축 등에 대한 논의를 누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유의하여요.
이 강의 전체를 통틀어 배운 과학 및 과학 철학을 통해 왜 우리가 과학을 추구하고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과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가지는 의미는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고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이유도 있으나, 우리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과학으로 인한 인간의 자기중심성 탈피는 우리 인간만이 고귀하고 존엄한 영혼을 가진 존재이며, 우주 속 모든 사물이 인간을 위해,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을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단지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다르게 ‘인지 유동성’의 발달로 인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낭만주의적 사고방식이 있기에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이지, 본래부터 세계에 존재하는 의미라는 것은 없다는 냉혹한 사실을 과학을 통해 직면하게 된다. 또한 고찰해 보면 인류는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과학 탐구에 그리 적합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낭만주의적 본성과 직관, 보수성, 자기중심성은 과학의 진보적 경향과 객관성과는 거리가 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과학을 통해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탈피하였으며,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뇌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지적 탐구에 대한 호기심과 사회적 협력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종이 된 것이다.
인간이 과학 탐구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종인 이유는, 우리의 신체 자체가 세계의 객관적 지식을 알고 탐구해내기 위해 진화해온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비롯한 많은 생물들은 타고난 직관이나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과학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면서도 그 원리나 성질을 분석해 보면 자연적인 사고나 직관을 거스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우리의 상식과 직관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과거의 과학의 발전과 과학사를 돌이켜 보았을 때 현대 수준의 과학까지 발전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짐작케 한다.
과학이 의미론적 세계의 해체에 기여한 과학혁명의 시기로 돌아가면, 의미로 가득 찬 세계에서 의미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물질로만 구성된 공허한 세계로의 역변을 당시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러한 고민들은 파스칼의 “팡세”의 여러 문구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의 의미가 없고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속에서의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 ‘나’는 우주 속에 부모 없이 던져진 아이와 같다는 실존적 고민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들은 오히려 객관성과 논리로 무장된 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과학 혁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치론적 함축은, 물질 세계 이외에 영혼이 존재하는 저편 넘어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삶의 목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자연적으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오류인 자연주의의 오류로부터 과학은 해방되었다. 사실로부터 가치나 당위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과 가치의 엄격한 분리를 통해 중세 과학은 급격히 탈 주술화, 탈 마법화를 거쳐 생각하고, 따져 이성적으로 수행하는 현대의 과학에 도달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과학은 우리에게 ‘사실과 가치의 분리’라는 중요한 격언을 제시해왔다. 이는 기존의 과학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던 “왜?”라는 인문학적, 낭만주의적 질문을 배척하고 오로지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과학은 현상 속에 어떤 인간적 의도나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과학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고, 대신 “어떻게?”라는 인과적 매커니즘에 대한 질문에만 답변하게 된 것이다.
과학은 현대의 사상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서구권의 과학 혁명 이후 객관성과 합리성에 그 바탕을 둔, 뉴턴 역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과학을 토대로 사람들은 이성을 바탕으로 진보를 이루는, 이른바 계몽주의와 이성주의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히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전반에 아울러 적용되었다. 그러나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계몽주의는 얼마나 이성적 사고와 과학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문화와 인종을 서열화하고, 무지몽매한 야만인들을 이성으로 계몽시켜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졌다. 결국 세계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이성과 합리성을 필두로 한 계몽주의의 쓴맛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향으로 문화상대주의를 그 근간으로 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행하게 되고 20세기 중반, 지구촌은 대대적인 “이성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문화 상대주의의 치명적 귀결은 중간고사와 다른 문항에서 자세히 다루었듯 결국 힘의 논리에 의한 지배로 흘러가게 된다. 이로 인해 다시 객관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되,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인권을 존중하는 보편주의적 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또한, 과학은 모든 것들의 ‘디지털화’를 촉구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디지털화는, 사회 속 인간을 원자적, 개념적 단위소로 보고 이들이 구성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권리를 누릴 때 사회가 운행된다는 것이다. 또한 정보화를 바탕으로 기존의 모든 정보들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화 되면서 컴퓨터와 반도체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디지털화는 결국 과학이 가장 기본이 되는 원자, 분자의 스케일부터 우리 사회와 문화 현상에 이르는 거시적 스케일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면서, 더 큰 범위의 개념을 작은 범위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에 의한 결과이다. 생물과 생명현상을 기본적인 분자구조와 물리법칙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성공하였으며, 사람의 심리와 마음, 더 나아가 사회현상과 거시적 관점의 흐름을 더 하위 계층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늘어나면서 21세기인 지금 최신 과학 분야들이 신생하고 있다. 복잡계 네트워크 또한 초기 과학이지만 환원주의에 입각하여 작은 스케일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현상이 큰 스케일에 와서 나타나는 창발성과 네트워크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중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적응해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에 객관적으로 답변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생명과학과 열역학의 연구를 통해 인류를 포함한 생명은 시간이라는 축에 매인 존재로 엔트로피의 증가를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결정론에 입각하여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부여되는지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기인식으로부터 설명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역학적 제약에 의해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는 언제나 오류가 발생하는 것 처럼 우리 뇌의 자기 인식 또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기능이므로, 필연적으로 모순성과 역기능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결론짓자면, 과학은 인류의 철학사를 관통하는, ‘우리 삶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어쩌면 우리의 지능으로는 구할 수 없는 답변이며 그저 우리에게만 해결가능한 문제로 느껴질 뿐 실상은 그 의미론적 가치가 없는 일종의 ‘지능의 착시’라는 황당한 답변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하여 세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한다. 먼저, 귀납논리에 의해 입증되어왔다고 여겨졌던 과학에 큰 결함이 존재하며 지극히 연역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칼 포퍼의 반증주의 과학철학이 있다. 반증주의에 입각하면 진짜 과학과 가짜 과학은 구분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더 많은 제약과 금지를 주는, 반증가능성이 높은 이론이야 말로 더 좋은 이론이라고 주장하였다.
칼 포퍼의 반증주의 과학철학은 과학자들에게 일종의 이념적 권고사항이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줌으로써 입증이 아닌 반증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이론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토마스 쿤은 대부분의 일반적인 정상과학자들이 수행하는 과학의 방법이 실제 과학의 수행 방법이고, 이를 통해서도 충분히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통념적인 과학에 대한 고정관념과 실제 과학의 차이를 통해 사실 과학자들도 사회적 인정을 동기 삼아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에 철저한 보수성에 입각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또한 그는 정상과학의 기본 단위가 이론과 법칙이 아닌 예제와 정답의 세트로 구성된 패러다임이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과학자의 과제라고 보았다. 뇌의 배선 자체가 논리적 사고보다는 패턴 인식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원리에 의한 논리적 접근이 아닌 패러다임적 접근이 인간에게 유효한 것이다.
토마스 쿤은 지극히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과학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가 오히려 보수성 그 자체에 잠재되어 있음을 주장하였다. 역설적으로 정상과학자들의 보수성이 새로운 것, 즉 과학혁명의 존재를 더욱 뚜렷히 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떠한 불일치에 대응하기 위해 더욱더 강화된 의심과 정밀한 측정을 통해 일치성을 추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발견될 수 있는 과학 혁명이 더욱더 구체적이고 뚜렷해져 간다는 것이다.
문제 2
(2) 생명(life)이란 무엇일까요? 생명이란 물리적인 기계와 다를 바 없는 것일까요?
→ 생명에 대하여 강의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활용하여 위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되도록 하나의 짧은 글을 만들어 보아요.(4.0점)
- 적절한 제목을 만들어 붙일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무질서의 강을 거스르는 연어, 생명>
코페르니쿠스의 전환과 다윈의 진화론을 비롯하여 낭만중심 주의의 인간관이 깨지고 결정론과 유물론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 속에서 생물학이 발전하며 인간을 비롯한 생물의 본질은 고귀한 영혼이 육체에 입혀진 것이 아니라 물질 단위의 기계적 조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이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톱니바퀴나 회로로 이루어진 기계처럼 생물도 유기체의 기계적 조합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은 단지 우리의 존재론적 물음인 인간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이유, 영혼과 같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만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생명체가 물리적 기계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 질문의 대답에 의해 인류의 지고한 문제인 죽음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명이 단순한 기계라면, 고장난 부분을 고칠 수 있는 기계처럼 죽음을 해결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생물이 단순한 기계로 치부되지 않는다면, 기계의 고장난 부분을 고치는 것처럼 단순한 방법으로는 생물의 죽음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물과 물리적 기계의 본질적 차이점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체라면 불가피하며, 운명과도 같은 죽음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 죽음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차이점은 비가역성에 있다. 이러한 생명의 비가역성은 생명현상은 시간성과 뗄레야 뗄 수 없기에 시간의 비가역성에서 이러한 현상이 비롯된 것이다. 시간의 비가역성은 일차적으로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엔트로피의 비가역성, 즉 전체 계의 엔트로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조건 증가한다는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생명활동 과정 또한 열역학적 과정이므로 엔트로피 법칙의 적용대상임은 자명하다. 앞서 논의한 죽음 또한 생명이 결과적으로 엔트로피가 가장 큰, 열역학적 평형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열역학적 평형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생명체로부터 열역학적(정적) 평형 상태가 도래한다는 것은 곧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균질한, 그리고 가장 무질서한 상태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물은 여기서 ‘교환’, 생물학적 용어로는 물질대사를 통해 자신의 질서, 곧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게 된다. 슈뢰딩거는 음의 엔트로피를 양의 엔트로피와 교환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이는 용어적 오류일 뿐이고 실상은 생물체 내부의 엔트로피를 낮추어 질서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무책임하게 자신의 몸속에서 만들어진 높은 엔트로피를 주위 환경으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엔트로피 증가 법칙은 언제나 성립하므로 이를 거스른다는 표현은 다소 부적절하며, 생명체와 전체 계를 총합하였을 때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지만, 생명체는 생명활동을 통해 체내의 엔트로피를 밖으로 던져 보내 체내에는 항상 낮은 엔트로피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 엔트로피 교환의 매개체가 바로 생물이 마시는 공기, 섭취하고 배출하는 물과 음식물인 것이다.생명이란>
끊임없는 생물의 생명활동은 생물체 내부의 엔트로피를 낮게 유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만 결국 원자, 분자 레벨의 물질을 매개체로 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생물체 내부에서는 물질의 교환과 순환, 흐름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생물체를 구성하는 원자는 몇 달 뒤면 99% 이상 새 것으로 바뀐다는 연구 결과를 통해 우리가 끊임없이 외부와 물질을 교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물질 교환의 목적은 당연하게도 생물 내부의 엔트로피를 줄이기 위한 과정으로 물질을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이며, 생물이 살아있다면 엔트로피를 줄이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 과정은 곧 물질 교환이 일어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넓게 보았을 때 생명을 ‘동적 물질교환의 상태, 그 흐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바깥에서 생물을 볼 때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몸 속 원자는 끊임없이 바뀌고 있음에도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태를 ‘동적 평형’ 상태라고 하며, 열역학적 죽음인 ‘정적 평형’이라는 용어와 대치해서 사용한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떻게 엔트로피라는 필연성의 법칙 속에서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당연하게도 생명은 엔트로피의 강에 귀속된 존재로 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러나 제목에서 쓴 것과 같이 생명체는 엔트로피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연어가 급류의 속도와 같이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면 밖에서 보았을 때 연어는 정지해 있는 것 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이 겉으로 보았을 때 생물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 처럼 보이는 동적 평형이다. 그러나 연어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 위해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연어의 근처 급류는 흐름에 몸을 맡긴 연어보다 더 빠른 속도가 된다. 이는 엔트로피 법칙이 연어를 둘러싼 계 전체에 적용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연어 개인의 입장에서는 질서를 유지하고 낮은 엔트로피를 향해 가는 것처럼 보이나,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펄떡임이 주변의 엔트로피를 더 증가시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명은 유한하다. 즉 모든 연어는 죽어서 다시 엔트로피의 강을 따라 바다로 쓸려내려오게 된다. 그러나 연어의 본래 목적, 알을 낳아 자손을 번성시키는 행위를 성공한 경우 연어의 알에서 태어난 새끼 연어는 다시 그 부모가 그리했듯 엔트로피의 강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문제 3
(3) 우리 인체의 모든 세포(대략 70조 개)에 기본적으로 동일한 DNA가 들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것은 아닐까요?
→ 인체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보다 일반화하여 보는 관점에서 답하여 보아요.(1.4점)
DNA는 우리 세포의 설계도로, 각각의 세포들이 가장 기본형인 줄기세포로부터 시작하여 신체의 다양한 부위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모든 세포에는 핵 속에 DNA가 들어있는데, 이는 인간을 구성하는 70조개나 되는 세포 하나하나가 신체의 모든 세포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위장의 세포가 뇌세포의 설계도를, 피부 세포가 눈을 구성하는 원추세포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전체 DNA를 모두 가지고 있기보다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DNA만 가지고 있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는 인체의 세포가 처음 만들어질 때 어떠한 세포로 분화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나 직업이 정해져서 태어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세포 또한 일종의 백지상태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위치한 곳의 주변에 세포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분화하게 된다. 오히려 줄기세포 때부터 자신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면 세포가 지정된 위치까지 이동해야 하므로 모든 세포에 전체 DNA가 들어 있는 것 보다 더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 이렇듯 개개의 세포는 주변 환경에 의해 분화되고 기능을 하지만 세포들이 개체의 중앙통제자로부터 지침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세포들 로부터 ‘눈치껏’ 정보를 얻어 자신의 맡은 바 역할을 다한다. 이러한 인간의 세포들 로부터 복잡계 네트워크의 특성을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복잡계 네트워크란, 기본적으로 동등한 최소 단위(개체)들이 주변의 개체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각각의 기능을 수행하여 네트워크를 이루고, 전체 네트워크는 각 개체 단위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나 달성이 불가능한 복잡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시스템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및 동식물의 세포들 에서도 이러한 복잡계 네트워크의 특성을 볼 수 있는데, 세포 하나하나가 개체의 전체 상황을 알지 못하지만 주변 다른 세포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통하여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개체를 조화롭게 한다. 또한 각 세포는 원래부터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따라 유동적으로 자기 자신의 역할을 결정한다. 즉 특정 역할을 하는 세포로 분화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복잡계 네트워크의 특성을 가진 인간의 세포들에서 각 세포들이 맡게 될 역할은 주변 환경에 의해 결정되므로 모든 세포들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어떠한 세포로도 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미 분화되어 제 기능을 하는 세포의 입장에서는 필요도 없는 DNA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직 기능이 정해지지 않은 줄기세포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분화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모든 정보를 담은 DNA를 가지고 있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문제 4
(4)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정신질환’(우울증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마음의 병인데 무슨 약이 소용 있겠냐.” “몸에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병이 난 것이니까, 아무리 약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여도 결국에는 자신이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굳은 의지를 가지고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해 왔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여전히 이런 생각이 대중적으로 광범위한 이유(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풀어서 설명하여 보아요.(2.4점)
- 1987년 미국 식품의약청 승인을 받은 ‘프로작’의 등장은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개인의 의지나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라기보다는 신경전달물질의 이상에 따라 생긴 ‘생리적 질환’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었고, 그에 따라 ‘정신질환’에 대한 약물 치료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겠습니다.
정신질환은 과거부터 오랫동안 터부시되어 왔다. 정신질환, 특히 우울증, 조울증 등은 환자의 마음이 약해져서, 굳은 결의가 없는 나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발생하는 병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서는 우울증 등을 병으로 간주 하지도 않고 꾀병이나 나약한 정신에서 발생하는 의지의 문제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뇌과학과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유전적 환경적 특성에 의해 특정 신경전달물질이 덜 분비되거나 더 분비되어 심리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명백히 밝혀지고, 심인성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에 관련된 약을 투약할 경우 큰 부작용 없이 호전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신적인 이유로 병원에 방문하여 약을 처방받는 행위 자체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에 여전히 약물치료를 택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도, 심지어는 내담자 본인 마저도 자신의 심리적, 정신적 상태에서 병의 요인을 찾지, 이를 뇌 자체의 신경전달물질의 문제, 약을 복용해서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틀에 박힌 인식은 현대 과학이 발전했음에도 만연하다. 속이 안 좋으면 위장약을 먹고, 두통이 생기면 두통약을 먹지만, 우울감이 든다는 뇌의, 그리고 정신적 고통에는 약을 먹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현상은 나의 두뇌 속 생각, 사고, 정서와 감정은 신체에 귀속된 것이 아닌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지적으로는 뇌에서 인간의 사고와 감정이 처리되고, 뇌 또한 신체 기관의 일부, 즉 물질로 구성된 기관으로 호르몬과 신경 전달물질의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생각과 판단은 나의 자유의지로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정신질환 또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고, 자유의지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질환은 개인의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실제로 정신질환은 마음먹기에 따라 그 증세가 호전된다는 것은 일부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대중들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정신질환이 심리적 요인에 의해 촉발되며, 심리적으로 마음먹기에 따라 치료의 경과가 달라지고, 증세 자체에 개선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로부터 모든 정신질환은 마음먹기에 따라 모두 나을 수 있다는 점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그래도 인식이 좋아지고 있지만, 사람들의 뇌리 속에 정신질환으로 약을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그동안 박혀 있던 심신이원론적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질환에 대해 이러한 대중적 고정관념이 뿌리 박힌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뇌의 배선 자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인식하는 뇌의 부분과 우리의 마음, 즉 자아를 인식하는 뇌의 부분은 서로 다르다. 현생인류의 뇌의 배선이 이렇듯 육신과 영혼을 구분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인식이 바뀌고, 교육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볼 때 육체와 마음이 하나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은 분리 가능하고 이질적이어서, 정신질환과 같이 영혼에 발생한다고 간주되는 병은 육체적인 약의 치료가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결론짓자면, 우리는 뇌의 배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심신이원론자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정신질환을 약으로 해결한다는 방법에 대한 대중적인 통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문제 5
(5) 우리는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 관련된 강의 콘텐츠를 잘 찾아서 이 물음에 답하는 방식으로 정리하여 보아요.(5.2점)
- 강의에서 논의된 범위 내에서만 답하면 됩니다.
[유의] 여기서 ‘이해’라는 것은 ‘과학적인 이해’(‘how’에 대해 규명하고 알아내는 것)를 뜻합니다. 곧 어떤 인간적 의도나 목적 등에 대해 ‘이해’하는 것(‘why’에 대한 이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 인류의 네트워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사람 개개인이 전체 인류에서 차지하는 비율이나 중요도는 사실상 0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다. 전체 인류, 문명, 사회 속에서의 개인은 너무나도 미시적인 존재로, 거시적인 현상이나 작용, 세계의 스케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기 어렵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잡계 네트워크의 입장에서 인류 속 개인과 개미집 속 개미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개미 한 마리가 전체 개미집에서 일어나는 물질의 흐름과 사건에 대해서 알 수 있는가? 개미집 속 개미 한 마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단순히 다른 개미들이 남긴 페로몬의 냄새의 흐름을 쫓아 음식이나 개미 알을 나르고, 다른 음식이나 위협이 감지되면 페로몬을 뿌려 다른 개미들에게 알리는, 정말 단순한 규칙에 의해 행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미들이 수천 수만 마리가 모인 개미집에서는 늘어난 개미에 대응하여 개미집 내부에 새로운 방을 만들고, 침략자에 대응하고, 비가 오기 전에 여왕개미와 알을 대피시키는 등 한 마리의 개미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인류에 있어서 한 명의 인간도 개미 한 마리와 동치라고 볼 수 있다. 개인에 있어서는 자신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지위에 맞는 행동을 하고, 회사에 나가 돈을 벌고,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려 자녀를 양육하는 행동만을 하였을 뿐인데, 경제 시장이 운영되고, 정치 체계가 유지되며, 더 나아가 과학과 학문이 진보되는, 개개인의 능력을 크게 벗어난 대규모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류에서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하위 unit인 사람 개개인은 거시적 스케일에서 일어나는 문화와 사회의 역변, 과학의 발전과 사회 네트워크 전체에 대한 통찰을 알 수 있을까? 2차원에 살고 있는 사람이 3차원의 정육면체를 감히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처럼, 하위 레벨에서 상위 레벨로 이동하면서 돌연 등장하는 창발성을 가장 하위 레벨인 우리 인간 개인이 알기는 쉽지 않다. 이는 인류의 거대한 네트워크 속 개개인의 사람들이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네트워크의 지정된 자리 속에서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규칙 혹은 규율을 따라 행동하며 자신의 주변의 네트워크와만 정보를 교환하기 때문이다. 인류 역시 복잡계 네트워크의 특성을 가진다. 개체는 각 개체가 가진 물리적 능력의 한계와 네트워크의 물리적 한계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국지적 정보만을 알 수 있다. 즉 개인이 알 수 있는 인지적 세계의 경계는 굉장히 국소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세계에 대해 완벽히 통달했다고 주장한다면 대부분의 경우는 전체 세계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굉장히 국지적이고 미소한 네트워크의 일부분만을 이해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는 자신과 그 주변의 국지적 네트워크조차도 완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류의 발전과 존속에 협력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개인으로써 의무를 다하고 있다. 심지어는 그 의무를 다하지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개인의 행동이 전체 네트워크의 레벨에서는 협력적인 것으로 산출될 수 있다. 마치 일개미의 2/3 정도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개미들의 군집이 매우 효율적인 네트워크인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인간 개개인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매우 작은 unit에 불과하기에, 그리고 국지적으로만 정보를 주고받으며 가장 단순한 행위만을 할 수 있기에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자신을 둘러싼 국지적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 이로 인해 인간 개인이 세계 전체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인간 특유의 사회적 능력과 협업을 통해 수천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문명과 지식을 쌓아 올려 왔으며, 세계화와 인터넷과 같은 수단을 발달로 인해 국지적 레벨에서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이전과 다르게 최신 기술과 도구를 이용해 어느 정도 큰 스케일에서 정보를 취득하게 되었으며 집단 지성의 도움을 받아 서로 협력하여 지식을 발전시키는 일도 가능케 되었다. 인류가 여전히 거시적 스케일에서 볼 때는 개미집의 개미 한 마리보다도 기여도가 낮은 존재일 수는 있지만, 인류 특유의 본성을 이용해 개체가 원래라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전체 세계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계속해서 도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정론에 입각하여 세상을 관찰할 때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세상의 일부분인 자기 자신도 이해하고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인식 문제와 결정론적 세계관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냐는 것이다. 열역학적 제약에 의해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는 언제나 오류가 발생하는 것처럼 우리 뇌의 자기 인식 또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기능이므로, 필연적으로 모순성과 역기능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지능의 착시로 인해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는지 묻는 질문이 정당한 질문이라고 보고 답을 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인식능력을 포함한 우리의 지능으로는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오히려 이는 지능의 역기능으로 인한 착시로 보는 것이 더 옳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우리는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하등한 존재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문제 6
(6) 한국의 전통 음식에는 “개고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개고기 식용”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증적 서술을 통해 명확하게 제시해 보아요.(2.6점)
- “논증”은 “결론과 전제(들)”로 이루어집니다.(달리 말해 “주장과 근거(들)”로 이루어집니다.)
- 강의를 통해 제시된 여러 논의들과 무관하게 서술되는 답안은 무득점이 될 수도 있어요.
- 강의에서 제시된 관점에 대해 반박하는 논증을 전개해도 무방합니다. 즉 “찬반 여부”는 평가 기준이 아닙니다. 다만 어느 쪽의 입장이든 논리적으로 타당하면서 가치론적으로 바람직해야 하겠지요.
개고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복날에 먹는 보신탕에 들어가는 고기이다. 서구권에서 개를 가족처럼 여기고 대하는 애견 문화가 발달하면서 한국의 개고기를 먹는 문화는 그들이 보았을 때 친구를 먹는 야만스러운 문화로 여겨지고 지탄받았다. 그러나 나는 개고기를 먹는 문화가 보편적인 사회 규범이나 도덕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를 먹는 문화가 용인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외국, 특히 서구권으로부터 개고기 식용이 야만적이므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올 때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 대응은 비슷한 논리적 전개를 가졌다. 문화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문명만 문명이고,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인 개고기를 야만으로 보는 행위가 제국주의 적이며, 문화가 상대적이므로 우리나라의 고유한 개고기 식용 문화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주장을 주로 내놓았다. 또 개고기 식용이 야만적인 근거로 개고기를 만들기 위해 개를 도축하는 과정에서 몽둥이로 개를 두들겨 팬 다음 개를 죽이면 육질이 좋아져 그렇게 만든다는 낭설이 퍼지며 개를 잡는 과정이 비인도적임을 강조하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이 때 개고기 식용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반론의 주요한 포인트는, 소나 닭을 도축할 때에도 똑같이 비인도적이며, 프랑스의 푸아그라와 같이 고유한 식문화 속에서 비인도적인 도축이 일어나는데 왜 개고기에만 예민한 것이냐는 식의 대응도 종종 보인다. 결국 이러한 주장들을 요약해 보면 서구식 음식과 문화를 우리가 존중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고유 문화인 개고기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식의 접근으로는 절대 개고기의 식용이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하여 개고기 논쟁을 옹호하려 들게 되면, 결국 문화상대주의의 역설에 의해 개고기 식용이 정당화 되기는 커녕 되려 힘의 논리에 의해 더 강한 쪽의 주장만이 살아남게 된다. 문화상대주의자를 자처하는 순간 우리는 개고기 식용에 대한 정당성을 얻을지 몰라도,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비판할 여지가 전혀 없어지게 된다.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하면, 개를 사랑하는 문화 속에서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존중받아야 마땅한 의견이기 때문이다. 각 문화에 대해 서로가 어떠한 판단이나 비판적 사고를 내릴 수 없으니 종국에는 힘의 논리에 의해 약자가 사라지거나 의견을 굽히게 되면서 갈등이 ‘해소’되는 식의 종결만이 가능하다. 실제로 상대적 약소국인 우리나라도 서구권의 계속되어온 개고기 식용 반대 주장에 개고기 판매 업소를 없애고 금지하는 등 강대국의 눈치를 보는 행동을 보였고, 결국 현재에 와서는 개고기 판매 음식점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나라에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적어지면서 갈등이 해결이 아닌 해소로 끝난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상대주의의 역설에 의한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 개고기 식용에 대한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문화 상대주의가 아닌 객관성과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해당 식문화를 분석해야만 한다. 개고기의 식용이 야만적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잘 들여다보면, 개는 인류와 함께 해온 동반자이자 친구와 같은 반려동물이기 때문에 이를 먹는 행위를 야만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 근거에 산재된 오류는 개가 많은 사람들이 키우는 반려 동물이라는 점이 개고기를 식용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당위성 명제로 곧바로 귀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더구나 동물을 분류할 때 애완 혹은 반려동물로 삼는 동물과 식용으로 삼기 위해 기르는 가축의 구분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소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소고기를 먹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도 반려동물로 키우는 사람이 있다고(혹은 많다고) 해서 식용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당위성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에서 확실히 구분해야 할 점은, 과거 일부 개를 도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무분별한 폭력에 대해서 용인하는 점이 아니다. 개의 도축 과정의 비인도성을 문제 삼거나, 다른 동물들의 도축 과정과 비교하며 상대주의적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본질을 흐리고 개고기 식용을 해서는, 혹은 하지 말아야 할 이유와는 관련 없는 동물 보호와 인도주의에 관한 토픽으로 귀결되므로 이 부분을 다루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자면 개고기의 식용을 찬성하는 입장 자체는 개의 사육이나 도축 과정에 어떠한 비인도적 과정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서의 찬성이라는 것이다.
문제 7
(7)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이 세계가 완전히 필연적으로 운행되는 것은 아니라서 순수한 우연성이나 카오스의 틈새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이들이 왜 이렇게 주장하였는지 설명하고, 이들의 주장이 타당한지도 논의해 보아요.(1.6점)
19세기 가장 크게 대두되었던 사상과 세계관의 대립은 과학자로 대표되는 modernist의 결정론적 세계관과, 낭만주의자들의 비결정론적 세계관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이 세계의 모든 사건이 필연적 법칙을 따르지 않고 순수한 우연성의 여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무질서(chaos)의 틈새’가 존재하여 이를 통해 인간의 의지와 염원이 사건에 개입하여 결과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무질서의 틈새에 대한 믿음은 과거의 동화나 신화에서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말 많은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들어줄 것이다’라는 말이라던가, ‘생생히 꿈꾸고 원하면 실현될 것이다’ 라는 말 속에는 인간의 의지와 염원만으로 결과가 바뀌는, 일종의 판타지스럽고 드라마틱한 전개를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낭만주의자들은 19세기 결정론자들에 의해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수한 우연성의 틈이 존재하여야만 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간절한 염원과 소망이 카오스의 틈새에서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지만 결정론에 의해 자유의지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존재함을 보이기 위해 순수한 우연성의 개입을 용인하는 것은 크게 2가지 측면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첫째로는 ‘무질서의 틈새’, ‘운명론의 개입’이라는 키워드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과 인지유동성의 범람으로부터 비롯된 개념이다. 앞서 언급하였던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예시에서 명백히 확인할 수 있듯이 단지 자유의지에 의해 바라고 염원하는 것 만으로 사건의 결과가 바뀐다는 것 자체가 우주 속에서의 주인공은 ‘나’이고 우주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전제가 바탕이 된 이야기이다. 그러나 잘 알고 있듯이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며 모두에게 동일한 법칙이 적용되는 냉혹한 세상이다. 그 속에서 우연성의 틈을 믿고 기대는 행위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보고 있거나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인지유동성의 결과물인 것이다.
둘째로 당시의 낭만주의자들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배타적인 것으로 보고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결정론과 비결정론 각각을 긍정하고 자유의지를 보았을 때 그 어느 입장을 택하더라도 자유의지가 존재할 수 없거나 존재하더라도 무가치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정론에 입각한 세계관에서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느끼는 것들도 사실 이미 결정된 필연적 법칙에 의한 결과물을 우리가 제어 가능한 자유의지로 느낄 뿐이다. 그러나 결정론을 완전히 받아들여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경우 우리가 견지할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은 역설적으로 운명론이 될 것이다. 어떠한 일의 성패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에 무관하게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고, 내가 노력을 할지 안 할지, 의지를 가질지 아닐지 조차 이미 결정론에 의하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인생을 비관하고 무기력감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 자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숙명론적 자세를 가지는 것뿐이다.
반대로 이 세계가 결정론적으로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고 순수한 우연이 발생하는 동화 속 세계인 비결정론을 가정할 경우에도 우리의 자유의지는 덧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의 마음먹기와 의지에 따라 어떠한 사건이 실체화될 수 있다면, 이러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원인에 따른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건들은 우연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그저 순수한 우연성에 틈에 내가 원하는 대로 사건이 일어나기를 맡기기를 비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성의 노예가 된 세계 속에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결국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관점 어디에서도 자유의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자유의지와 결정론이라는 개념이 서로 비교가능한, 즉 동일한 카테고리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배타적 개념이므로 우연성을 받아들여야만 자유의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정론 속에서도 자유의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 8
(8)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은 “과학에 대한 대중적 공포”를 유포시키는 데에 꽤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오늘날 관찰할 수 있는 “과학에 대한 대중적 공포” 사례를 한 가지 들고, 그와 관련하여 어떤 문제(논리적 오류, 과학적 오류, 사회적 문제 등)가 있을 수 있는지 설명해 보아요.(1.8점)
- 이 문제의 경우에는 수업 시간이나 강의 자료를 통해 제시된 사례를 들어도 무방합니다. 물론 적절하면서도 새로운 사례를 발굴한다면 좋은 득점이 되겠지요.
SF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는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간의 지능과 능력을 넘어서는 우월한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세상을 정복하는 시나리오이다. 특히 최근에는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챗지피티(Chat-GPT)라는 범용 인공지능 모델이 등장하여 더 화제가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공지능의 발전을 우려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일차적으로는 인공지능이 사람의 업무를 대신하면서 일자리를 빼앗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인간보다 나은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현대의 인공지능은 소설 프랑켄슈타인과의 유비를 통해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가지는 과학의 대중적 공포를 이해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은 물질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로, 당시의 첨단 과학과 결정론을 대변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괴물이 제어 불가능해지면서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고 프랑켄슈타인 박사까지 죽는 파국을 연출하며 대중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있다. 과학과 결정론의 산물인 괴물에 대응되는 현대의 인공지능은, 컴퓨터 기술과 반도체 기술의 집약체로서 마치 살덩어리라는 물질로부터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만든 것 처럼, 전자 회로와 기계 부품으로부터 인간의 지능과 지성을 만든 것처럼 느껴진다.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이 ‘인간은 고유한 영혼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낱 괴물 따위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와 동치로, 아무리 발전된 인공지능도 인간만이 고유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감정들, 이를테면 사랑, 우정, 양심과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없으며, 결국 자연에 반하는(혹은 신을 거스르는) 영역에 손을 대는 행위는 마치 금단의 영역에 발을 딛는 것이라는 공포심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정확히는 서두에 말했듯 수많은 SF 영화에서 이러한 인간의 낭만주의적 본성을 자극하는 모티프를 내세우며 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과학기술의 산물을 비자연적인 것으로 느끼고 배척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이다.
문제 9
(9) 우리(현생 인류)는 “자연계의 유일한 낭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물음들에 답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낭만적 본성”에 대하여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보아요.(7.0점)
·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서 “자연계의 유일한 낭만주의자”가 된 것일까요?
· “자연계의 유일한 낭만주의자”가 됨으로써 가지게 된 (다른 존재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생 인류 특유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낭만주의자로서 우리는, 자연계의 다른 존재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럴 수 있는 것일까요?
· 우리의 낭만주의적 본성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요?
- 답안에는 반드시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모두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마하트마 간디)라는 말과 그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포함되지 않을 경우 무득점이 될 수도 있어요.)
현생 인류를 다른 동물, 초기 인류와 구분 지을 수 있는 특성은, 우리 인간만이 자연계의 유일한 낭만주의자라는 사실이다. 다른 동물도 아니고, 인간만이 이러한 특성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이 질문에 대해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꾸는 이른바 ‘인지 혁명’이 일어난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다른 인류의 종이나 일부 영장류들은 인간과 동일한 사회적 동물이기에 집단 생활을 하며 다른 사람의 감정과 심리를 고려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류에게만 주어진 ‘인지 혁명’은 단순히 사회적 뇌의 기능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허구성을 믿고, 그 것에 이름과 인격을 부여하여 마치 사람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지 유동성의 범람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목표로 결집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런 변화에 의해 인간은 침팬지나 다른 무리 생활을 하는 영장류와 비슷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음에도 문명을 건설하고 수천, 수만명이 협력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등 자연계에서 볼 수 없는 사회적 동물로 거듭나게 되었다.사피엔스>
인지 유동성의 범람은 여타 영장류와 다를 바 없는 인류를 온 지구에 번성하여 지배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사회적 유동성의 범람은 단순히 인류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자연계의 유일한 낭만주의자가 되도록 만들어주었다. 이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직 인간만 자연물이나 인공물에 비가시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다. ‘상징’은, 어떤 물체에 그 물체의 본질적 특성과는 관계없는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평화라는 관념과 어떠한 직접적 영향이 없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 대상물에 부여되는 관념이나 의미는 그 유래에 대한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유추하거나 추측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징체계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발전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 되어왔다. 이러한 상징 능력이 다른 동물들과 비교되는 점은, “장미는 ‘사랑’의 상징이다”라는 대응관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연스럽게 상징물을 볼 때 그 의미로 치환하여 생각한다는 것이다. 벨을 누르면 밥을 주는 훈련을 통해 동물들도 인간의 상징능력과 비슷한 무언가를 훈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은 실제로 동물이 ‘벨’은 음식의 상징으로 여기고 벨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벨을 누르면 밥을 준다는 대응 관계를 학습한 것에 불과하다. 결론짓자면, 현생인류는 뇌 속 배선의 우연한 변화로 인해 사회적 지능의 범람, 인지 혁명을 겪게 되었고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고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 능력과 낭만주의를 가능케 하였다는 사실이다.
인류가 자연계의 유일한 낭만주의자가 되면서 다른 동물과는 구분되는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먼저는, 인류는 눈에 보이는 것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을 손에 넣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예술과 음악, 종교와 문화의 발전이 야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물에 인격,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유행하고, 그러한 인격이 깃든 사물에 대한 주술적이고 마법적인 행위들 또한 인지 유동성의 측면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물에 부여된 인격과 영혼과 주술을 통해 교감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류는 다른 동물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문화 속에는 자연물들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와 사회적 메시지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특정 집단 내에서 부여된 상징과 의미가 오랫동안 해당 집단 내에서 받아들여져 오면서 전통으로 굳어져 문화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같은 상징들을 공유하는 집단끼리 결속되어 문명을 이루게 되고, 인류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를 발전시켜가며 지구의 지배자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발전한 과학과 풍족한 자원이 있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낭만주의적 본성, 즉 인지 유동성의 범람과 상징 능력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왔다. 인간은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사회적 욕망을 추구하게 되었고, 명예와 인정, 사랑과 존경과 같은 비물질적 가치를 상징능력을 통해 물질 속으로 투영시킬 수 있었다. 사회적 욕망의 추구를 위해 물질에 부여된 상징을 추구하는 현상은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필요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현대의 물질 문화는 더 이상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와 지위의 추구를 위해 모두가 경쟁하는 각축전이 되어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인정과 지위, 관계를 인정받기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을 이용하여 이를 확인하는 행위는 당연히도 모순적이며 자가당착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얻기 위해 물질을 추구하는 행위는 인지 유동성의 측면에서 우리가 물질에 부여된 상징을 철석같이 믿고 있기에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지구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모두의 탐욕을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는 우리 인류가 과도할 정도로 인간의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물질에 대한 과도한 추구를 하고 있으며 이는 물질의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사회를 탄생시켰다. 물질로 사회적 욕망을 채우려는 인류의 본성이 무서운 이유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사회적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경쟁적으로 촉진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경쟁심리를 자극하는 마케팅 전략을 통해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 소비 주기의 감소가 촉진된다. 모두가 의식주를 챙기기에는 충분한 지구의 자원이, 과도한 사회적 욕망의 추구가 물질적 생산과 소비로 이어지면서 누군가는 최소한의 의식주마저 영위하기 어려워지는, 간디가 우려했던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문제 10
(10) 다음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유명한 도입부입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 이것은 무엇(어떤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가능하다면 문장 하나하나 풀어서 해설해 보아요.(2.6점)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의 도입부에서는 고대인들의 삶에 대한 낭만주의적 서술들이 녹아 있다. 먼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 행복했던가?’ 의 문장에서는 우리 삶의 존재 이유와 삶 속에서 추구할 수 있는 의미론적 방향성을 별이 빛나는 창공으로 비유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 ‘별빛이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라는 어절에서는 과거에 의미론적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 목적과 방향성이 분명했던 시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혼돈의 시기 이전에는 나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 방향성에 대한 답변을 자연스레 내가 속한 공동체, 즉 부모나 혈연, 지역, 신분 등에서 찾게 되었는데, 이러한 낭만적 인식은 무저항적으로 수용되고 받아들여져 왔다. 또한 지도에 나와있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 일은 공동체의 습관과 관습을 따라 하던 대로 살기만 하면 되므로 그리 어렵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소설의>
모든 것이 새로우면서도 친숙하고, 모험으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의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대목에서는, 낭만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것 들에는 나름의 인간적인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처음 마주할 때는 새롭지만 항상 친숙하고, 마치 판타지 속 세계를 모험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세계 속에서 찾은 모든 것들의 존재론적 의미가 사실 이미 자신이 자의적으로 부여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계는 광대하지만 자신의 집처럼 아늑하다는 문장 또한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로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모든 존재들에 있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가 연결되어 있고 낯설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당연히도 이는 우리 인간이 직접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이 서로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은, ‘나’의 영혼은 내가 부여한 다른 의미론적 존재들과는 달리 고귀하고 존엄하며 그 영혼에 숭고한 목적이 있음을 인정하는, 일종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입각한 문구이다. 그러나 이 것이 결코 낯설어 질 수 없는 것은 모든 의미론적 존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의미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우리가 거닐고 있기에 결국 이질적이게 보이는 존재도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얽혀 있어 결국은 낯설지 않은 존재라는 점을 함축한다.
문제 11
(11) 칼 포퍼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쉽게 풀어서 설명하여 보아요.(2.4점)
- 답안에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이 필수적으로 포함·서술되어야 합니다. ① 진리(truth)에 대한 북극성의 비유 ②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구
칼 포퍼는 연역법에 입각하여 반증주의적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보았다. 그는 반증가능성의 측면에서 어떠한 이론에 대한 과학적 지위가 결정된다고 여겼으며, 금지하는 바가 많은, 세계의 운행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제약함으로써 그 정보를 알려주는 이론이 과학적으로 더 좋은 이론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증가능성의 측면에서 과학의 유일한 방법이 시행착오, 혹은 추측과 반박의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추측과 반박의 과정에서 관찰 귀결이 원래의 이론과 반대되는 결과로 이어지면 연역적으로 도출되었던 초기조건과 보조 가설들 중 하나가 거짓이라는 점이 도출된다고 했다. 이러한 반증과정을 통해 찾아지는 오류를 통해서 이 세계와 진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고, 이런 방법으로 진리에 점진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오류를 통한 과학의 진보 과정이라 주장하였다.
칼 포퍼의 관점에서의 과학의 진보 과정은 마치 북극성을 보고 길을 찾는 항해사와 같다. 첨단 문물이 발명되기 이전 시절의 뱃사람들은 항해를 할 때 북극성을 기준으로 항로를 설정하고 길을 찾아간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북극성은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는 일종의 ‘진리’이다. 하지만 뱃사람들은 북극성을 이용해 방향을 찾는 것이지 북극성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항해하는 것은 아니다. 즉 ‘진리’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 과학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류를 통해 배워서 진리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과학을 통한 진보의 올바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추가로, 여기에서 ‘진리’에 비유된 북극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별이다. 그러나 뱃사람들은 북극성을 도달하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길을 찾기 위한 등대와 같은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 ‘진리’는 북극성이라는 별이 실존하듯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존재하는 진리를 정확히 찾기 위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북극성을 통해 길을 찾는 것과 같이 탐구에 있어서 규제적인 이념성을 제시해 준다. 실재하면서도 이념적인 ‘북극성’을 ‘진리’에 빗댄 비유는 포퍼가 설명하는 과학의 진보의 개념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비유로 보인다.
반대로 포퍼는 과학 활동이나 지식 추구가 진실에 적중하는 것 그 자체를 목표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구에 따르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존중하되, 그것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조언하였다. 칼 포퍼가 비판하였던 정신분석, 마르크스 주의 등이 ‘진리’ 그 자체, 혹은 진리에 도달하였다고 주장되어진 이론의 예시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반증가능성의 측면에서 절대 반박될 수 없는 무적의 논리이며, 상상가능한 모든 사건이나 실례에 적용이 가능하므로 언제나 항상 옳은 진리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포퍼의 반증주의 철학에 입각하면 완전무결해 보이는 이론들은 ‘금지’하는 바가 전혀 없으며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이론일 뿐이다. 그는 진리에 도달하였다고 주장되는, 언제나 옳고 모든 사례에 적용 가능하여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이론들을 오히려 가짜 과학(pseudo-science) 이론으로 취급하고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문제 12
(12) “듀엥-콰인 입론”과 토마스 쿤의 “첫 번째 착안점”의 연관성을 아래 사례를 활용하여 설명하고,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기본적 특성은 무엇인지 제시하여 보아요.(2.0점)
그렇다면 이제 처음의 물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론과 자연이 잘 일치되지 않는 변칙사례를 의식하게 되는 경우, 과학자들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이제까지 말해온 바에 따른다면, 심지어 그 이론의 다른 적용 사례들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더 큰 불일치가 발생한다고 하여도, 이러한 불일치조차 반드시 매우 심각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어느 정도의 불일치들은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심지어 가장 완고한 불일치들에 대해서도 결국에는 정상적인 탐구 활동으로 대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변칙사례에 직면했을 때] 과학자들은 기다리려는 경향(willing to wait)을 아주 흔히 보이는데, 이는 특히 해당 분야의 다른 여러 부분들에 아직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경우 잘 드러나는 현상이다. 예컨대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것처럼, 뉴턴이 처음에 계산했던 이후로 60년 동안, 달이 지구와 가장 가까워지는 점(moon’s perigee)에 대해 [계산으로] 예측된 운동은 [실제로] 관측된 결과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수리물리학자들이 이렇게 익히 알려진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속해서 씨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에, 뉴턴의 역제곱 법칙을 수정해야 한다는 제안이 간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을 매우 심각하게 고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실제로 [이와 같은] 주요한 변칙사례에 대해 그처럼 인내한 것이 옳았다고 밝혀졌다. 1750년에 클레로(Clairaut)는, 이 적용 사례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학에서의 오류가 있었을 뿐, 뉴턴 이론은 전과 같이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나아가] 심지어 사소한 실수라곤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경우라고 하여도(아마도 이는 사용되고 있는 수학이 더욱 단순하거나, 또는 아주 친숙하면서도 이미 다른 곳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속적으로 인지되어 오던 변칙사례라고 해서 언제나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8장에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8장에서는 달의 근지점(moon’s perigee)의 뉴턴 법칙에 의한 계산과 실측 값의 불일치 문제가 60년간 지속되어 왔음에도 뉴턴의 물리법칙 체계에 심각한 위기나 붕괴를 초래하지 않은 사례를 설명하고 있다. 달의 근지점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과학자들은 실제 자연현상과 이론 값의 불일치에 즉각 대응하여 기존 가설을 즉각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불일치 문제에 침묵하고 인내하는 식의 대응이 보통이다. 이론값과 실제 관측값의 괴리, 혹은 반례의 발견이 즉각적으로 기존 가설의 의심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출된보수성에 입각하여 실험 결과에 사용된 초기 조건이나 보조 가설들과 같이 반례에 포함된 수많은 가설들의 오류를 검토해보고, 그래도 찾지 못하였다면 이를 설명할 새로운 이론이나 가설이 제시될 때까지 인내한다는 것이다.과학혁명의>
Duhem-Quine Thesis(듀엥-콰인 입론)은 과학적 가설이나 이론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가설이나 조건이 필요하다는 입론이다. 즉 가설의 검증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해당 가설 만으로 이를 수행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다른 가설이나 조건 등이 포함 되어야지만 한다. 이러한 논지에서 어떠한 가설을 반박하는 반례가 등장하였을 때 우리는 그 즉시 가설이 무결성을 추궁할 수 없으며 언제나 해당 반례를 구성하는 보조 가설, 초기 조건들 중 잘못된 것이 없는지를 따져야만 한다. 듀엥-콰인 입론의 예시는 앞서 제시된 달의 근지점의 불일치에 관한 사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뉴턴의 법칙을 바탕으로 계산된 달의 근지점과 실측값의 차이가 곧바로 뉴턴 법칙의 반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근지점의 계산을 위해 도입되었던 수많은 가정, 초기 조건, 보조 가설들 중 하나에서 실제로 오류가 발견된 것처럼, 어떠한 이론과 상반된 결과가 도출되었다는 것은 그 결과의 전체 과정 중 하나에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가설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토마스 쿤의 ‘첫 번째 착안점’인 대중적인 과학활동에 대한 인식과 실제로 수행되는 정상과학의 괴리는 결국 정상과학의 보수성에서 기인한다. 대중들이 인식하고 있는 과학은 상당히 파격적이며, 혁신적이고, 반증과 발상의 전환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정상과학자들은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나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정상 과학 내에서 수행하는 모든 실험은 과학 이론을 검증하고, 반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험을 수행하는 과학자의 수행 능력과 분석 능력을 확인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쿤은 이야기하고 있다. 정상과학에서의 실험이 이러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이론에 상반되는 반례가 나오더라도, 곧바로 원래의 이론을 폐기하지 않는다. 정상과학의 보수성에 입각하여 먼저는 실험자 개인의 능력을, 그 다음은 실험 장비와 같은 실험 조건들을, 그 다음은 본래의 이론이 아니라 실험에만 사용된 특수 조건이나 보조 가설을 의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듀엥-콰인 입론과 쿤의 첫번째 착안점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듀엥-콰인 입론과 쿤의 주장은 정상과학의 보수성이라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하게 된다. 그리고 정상과학의 보수성은 정상과학 또한 사람에 의해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인지적, 사회적 보수성에서 귀인한다는 사실까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제 13
(13) 토마스 쿤이 말하고 있는 실제 과학 활동의 모습 및 성격은 과학에 대한 일반적 통념(상식적 과학관, 대중적 시각)과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두 가지 관점이 어떤 지점들에서 어떻게 다른지 대조적으로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정리하면서 설명해 보아요.(5.0점)
앞서 문제 (12)에서 밝혔던 것처럼 대중이 가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통념적 인식과 실제로 대부분의 평범한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과학 활동은 큰 괴리를 가지고 있다. 과학에 대해 대중들이 가진 통념을 일화를 통해 접근해보도록 하자. 페니실린이라고 불리우는 항생제를 발명하여 이름을 떨친 생물학자 플레밍이 항생제를 발견하게 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포도상구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던 그가 잠시 휴가를 다녀온 사이 곰팡이로 오염되어 버린 배양 접시에 곰팡이가 핀 부분만 균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페니실리움이라 불리는 곰팡이의 항생 효과를 발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일화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버리고 지나쳤을 만한 사건을 플레밍이 캐치하여 위대한 발견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실험실에서의 실험활동과 과학은 우연하고 예측 불가능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더불어 과학자도 실험실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발견과 영감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쉽게 각인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시는 어린 아이들에게 과학자에 대한 묘사를 시킬 때 드러난다. 흰 실험 가운을 입고 형형색색의 플라스크에 용액들을 마구 조합하고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과학자의 모습을 대다수의 아이들은 상상할 것이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대중적 통념과는 다르게, 실제 정상과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수행하는 과학은 이와는 크게 다르다. 전형적인 실험실과 연구실의 환경 속에서 수행되는 실험이나 연구의 결과는, 기존 결과를 180도 뒤엎는 것이 아니라 99%는 예상 가능한 결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연구 주제를 설정하는 데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대부분의 연구는 기존 연구실에서 수행하던 연구에서 약간의 변형과 첨삭을 통해 만들어진 기존연구의 개선, 수정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연구 주제속에서 기대되는 실험 결과는 기존의 연구결과를 완전히 뒤엎는 반례가 아니라, 기존 결과의 경향성을 따라가되 약간의 향상이나 변화가 있는 정도일 것이다. 이러한 실험실 속에서는 일반 사람들의 과학에 대한 통념처럼, 우연성과 예측불가능성에서 패턴과 규칙을 찾아내는 창의적 활동이 아니라, 기존의 99%의 연구에 자신의 1%의 주관과 추론을 넣어 예측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발전과 발견을 꾀하는 매우 보수적인 활동이 과학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는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겉보기적 인식과 실제 수행하는 과학에 괴리가 있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하는 일과 실제 수행하는 일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 실험, 연구의 목적과 실제 과학자들이 현장에서 임하는 실험의 목적에도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 일반 대중들은 과학자의 연구실에서 수행되는 실험은 대부분 어떠한 가설에 대한 입증이나 반박을 위해 그 증거로써 실험이 수행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쿤은 실제 정상과학자들이 수행하는 실험의 목적은 가설의 입증과 반증보다는 실험자 본인의 역량에 대한 평가에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위 문단에서 언급하였던 것 처럼 실험에 대한 예측가능한 결론이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일말의 변형이나 새로운 발견의 여지가 없는, 이미 100%의 정답이 정해져 있는 실험을 수행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가 시험을 볼 때 정답이 정해져 있고 그 정답을 맞추려 애쓰듯이 과학 실험도 실험자의 과학적 사고와 실험 수행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시험지와 같다는 것이다. 이렇듯 실험을 수행하는 목적에서도 대중의 인식과 실제의 목적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이렇듯 실험의 목적이 새로운 법칙과 이론의 탄생의 장이 아니라 보수성에 둘러 쌓여 그저 실험자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격하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자들의 연구 동기와 실제 과학자들의 연구 동기에도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이나 이론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문제 풀이로써의 과학탐구를 그토록 추구하는 이유는,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주변의 연구자나 과학자들이 논문을 쓰고 학회에서 발표하는 것의 동기가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곤 한다. 일차적으로는 돈을 위해서 겠지만, 연구자의 깊은 마음 속에는 과학을 사랑하는 마음, 논리와 규칙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과학적 탐구욕, 문제해결을 통해 느끼는 순수한 학문적 유희 등이 있으니까 연구원을 하고 과학자를 하겠거니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제 1저자인 논문을 저명한 학술지에 내는 것, 교수가 되어 해당 분야의 권위자가 되는 것, 학회의 발표에 나가 박수를 받는 것 등 모든 연구와 실험의 산실은 과학자 본인의 사회적 인정이라는 한 방향으로 쏠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의 논의를 종합하여 보면, 과학자들이 그토록 그저 수수께끼나 퍼즐 풀이에 불과해 보이는 과학 실험을 수행하는 이유는 그 실험의 성취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며, 과학계의 기본적인 스탠스인 보수성은 자신이 반론을 제기하여 실패하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명예 실추에 대한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과학자들의 탐구정신과 능력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활동이 대중의 인식처럼 신성하고, 숭고한 활동이기 때문에 성역화될 것이 아니라 지극히 능력주의적이며, 자신의 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타의 직업들과 그 동기의 면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문제 14
(14) 박문호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아니고 능숙해짐이 공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 이해보다 기억이 더 중요하다.”
→ 이 말은 토마스 쿤의 “두 번째 착안점”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설명해 보아요.(2.0점)
박문호 선생님의 “이해가 아니고 능숙해짐이 공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 이해보다 기억이 더 중요하다.”라는 명언에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과 ‘두 번째 착안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중들은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무작정의 암기보다 근본적 ‘원리’를 파악하고 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통념은 대학을 진학하기 위한 고등 교육 과정 까지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 상식이나, ‘일머리’라고 부르는 일종의 노동에서의 능숙함, 심지어는 대학수준 이상의 교육에서까지 원리원칙을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쿤은 정상과학도들의 경험적 통찰을 바탕으로 과학 연구에서는 공식과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 만으로 실제 연구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쿤이 주장했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패러다임’은 정상과학에서의 기본 단위로서 개념이나 공식, 전체를 아우르는 법칙과는 상반되게 특정한, 혹은 구체적인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표준적 풀이의 세트인 예제를 의미한다. 더 넓은 범위에서의 패러다임은 이러한 예제 혹은 사례들과 그 사례들의 다양한 변형이 이루고 있는 네트워크를 사례들을 일컫는다. 쿤은 정상과학에서의 문제해결을 위해 공식과 법칙이 아닌 이런 패러다임을 적용하여 예제와 그 네트워크를 반복 숙달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이러한 패러다임을 적용하는 활동이 과학이며, 일반적인 통념과는 다르게 개념, 법칙, 관점,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규칙을 직접 사용하는 활동이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쿤의 두번째 착안점과 박문호 선생님의 명언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단순히 공식과 법칙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예제와 그 변형문제의 예시답안을 따라 풀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처럼, 패러다임과 그 네트워크를 몸으로 체화 시켜 익히는 것이 정상과학의 수행이자, 공부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들어 자전거로 균형을 잡는 법, 커브길을 도는 법, 브레이크를 잡는 법을 배우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실제 자전거를 한번이라도 타본 사람과 강의를 들어 이해한 사람은 천양지차이며 이해를 통해 얻게 되는 통찰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망각하게 된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며 몸으로 체득한 기억은 뇌의 비의식적 영역에 남아있기 때문에 자전거를 오랫동안 타지 않았던 사람도 조금만 시간을 주면 다시 자전거를 잘 타게 된다. 박문호 선생님의 ‘이해보다 기억이 더 중요하다.’ 라는 대목에서 오인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해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고 오직 지식과 개념을 암기하는 것에 치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순히 개념을 이해하는 것 만으로는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암기가 되었든, 비의식적 체득이 되었든 간에 반복을 통한 기억 과정이 도리어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축이 된다는 뜻이다.
문제 15
(15) 열역학법칙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기능은 반드시 역기능을 낳는다.”
→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 것인지 한 가지 사례를 들면서 쉽게 풀이해 보아요.(1.6점)
- 단 수업 시간이나 강의 자료에서 제시된 사례는 제외합니다. 이미 제시된 것인데도 중복 서술하는 경우에는 점수가 차감될 수 있어요.
열역학 제2법칙, 즉 계의 엔트로피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한다는 법칙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만드는 어떠한 도구나 기계, 유용한 기능도 원래의 의도와는 다른 역기능을 낳는다는 사실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기능을 도입하게 되면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기능을 도입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다른 문제, 즉 역기능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스마트폰의 발전이라는 예시를 통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스마트폰의 발명과 발전은 우리에게 있어 정말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단지 전화와 문자와 같은 통신의 기능을 넘어, 뉴스기사나 유튜브를 통한 멀티미디어 컨텐츠를 이용해 정보전달의 기능도 충실히 달성하고 있다. 이외에도 SNS, 게임과 같은 컨텐츠는 물론이고 은행 업무나 온라인 결제와 같은 컴퓨터의 기능 또한 일부 대체하여 크게 편의성이 향상되었다. 한편으로는 스마트폰의 도입으로 만들어진 역기능 또한 다수 존재한다.
스마트폰으로 대중화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나 역기능은 셀 수 없이 많다.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발생하는 시력 감퇴, 스마트폰만 보며 도로를 걸어 다녀 사고를 내는 스몸비 족, 스마트폰에 빠져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스마트폰 중독 등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문제가 존재한다.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인한 악영향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의 도입 그 자체로 발생하는 문제들도 존재한다. 스마트폰의 논리 회로와 스크린의 재료인 희토류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희토류 광산들이 만들어지면서 대기와 수질오염을 초래한다는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또 스마트폰의 기능 중 하나인 간편한 금융거래와 결재 등의 시스템을 악용하여 악성 앱을 이용한 도청, 금융사기 등 기존에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범죄와 역기능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스마트폰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떠한 기능이라도 그 기능을 도입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역기능은 항상 존재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하는 기능이 항상 해결하려는 문제보다 항상 복잡도가 더 높기 때문이다. 불편하게 유선 전화로, 종이 문서로 하던 작업들이 간편하고 빠른 스마트폰으로 대체되기 위해서는 그 스마트폰을 도입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공정과 과정들이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얻는 이득보다 훨씬 큰 복잡도를 가지기에 우리가 체감하거나 체감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에서는 역기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엔트로피 측면에서 내가 문제를 해결하면서 국지적으로 낮추는 엔트로피보다, 해결책을 도입하면서 증가하는 엔트로피가 항상 더 크게 되고, 겉보기에는 단점이 없어 보여도 어디선가는 엔트로피에 증가에 의한 역기능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 16
(16) 우리(현생 인류)는 본성적으로 모순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인지, 이와 관련되는 강의 콘텐츠들이 모두 포괄될 수 있도록 정리하면서 설명해 보아요.(4.4점)
- 다른 문제에 대해 서술한 답안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연계해서 서술해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이 모순적이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하는 것 같다. 우리의 인생, 산다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피상적으로 보았을 때는 물질 대사를 하고 엔트로피를 유지하고, 안전한 관경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번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우리 인생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 그 중에서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였을 때 한 사람을 둘러싼 사회, 문화, 더 나아가 인류 문명 전체를 통틀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이 모순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왜 이러한 모순성이 비롯되었을까?
가장 기본적인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에 법칙 하에 생명체는 살아가게 된다. 위 문항의 답변에서 여러 번 다루었듯이 엔트로피를 국지적으로 거스르며 살아가는 생명체는 결과적으로 전체 엔트로피의 측면에서는 손해이다. 즉 생명활동 자체로 개체 하나의 엔트로피는 낮출 수 있겠지만, 생명활동의 부산물로 외부의 엔트로피 증가량이 개체 내부에서 감소하는 엔트로피 량보다 더 많기에 생명활동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엔트로피 측면에서 무조건적 손해를 보게 된다. 필연적으로 생명활동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주변 환경 자체가 변화함을 의미한다.
생명체의 종족 유지와 번성은 주위 환경에 생명체를 맞추어 적응시키는 과정을 통해 항상 이루어져 왔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초음파를 쏘는 방향으로 적응한 박쥐, 넓은 귀의 면적으로 체열을 방출하기 쉬운 구조로 적응한 사막 여우, 그리고 다른 인간과 관계가 너무나도 중요해진 나머지 인지 유동성의 범람으로 인한 사회적 뇌를 갖게 된 인간까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나, 국지적 관점에서 보나 생명체의 적응은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생명체의 적응은 주위 환경에 맞추어 개체의 기능이 바뀌거나 생명활동 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하였듯 생명체는 생명활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주위 환경을 바꾸어 놓는다. 환경에 잘 적응하여 생물이 번성하면, 그 번성한 생물들로 인해 환경이 바뀌게 되고, 이로 인해 원래의 환경에 잘 적응한 생물은 바뀐 환경에서는 적응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을 추구하지만, 적응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환경을 변화시켜 부적응을 낳게 되는, 모순성을 가지게 된다.
엔트로피적 관점, 생물의 개체적 관점에서의 모순성을 앞서 살펴보았다면, 스케일을 넓혀 인간의 삶, 문화, 인류 자체에서도 위와 동일한 논지로 모순성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삶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그 성공에 사로잡혀 이후의 일에 자신의 성공공식대로 대응하게 된다. 이는 결국에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인 보수성을 가지고 있기에 성공을 경험한 이후 다른 문제에 직면할 때 자신이 성공하였던 방법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추세는 기업, 국가, 문명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번의 큰 성공을 거두고 나면, 보수성에 입각하여 동일한 판매 전략, 동일한 정치 체계, 동일한 기조를 유지하면서 더 성공하기를 꿈꾼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환경은 변화하게 되고 그에 따라 필요로 하는 대응 전략은 달라지게 된다. 유연하게 환경에 대처하지 못하고 개인, 기업, 국가가 몰락하는 것은 이전의 성공의 기억과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인 것 같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성공과 번성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성공으로 인해 발목이 잡히는 모순성을 더 큰 스케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 인간, 기업과 문명의 몰락은 예견된 것이므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그렇지 않다. 모든 모순성은 결국 엔트로피로부터, 더 나아가서는 시간의 비가역성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을 이용하여 나의 활동, 성공이나 다른 요인으로 인해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적절한 시간 안에 대응과 대비책을 마련하면, 그 모순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한번 해결된 모순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 해결과정은 새로운 역기능을 낳을 것이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모순의 발생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대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성공과 쌓인 경험에 입각한 보수성을 보이게 될 경우 파국에 도달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