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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청동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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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이미 우리는 5월의 냄새를 맡았다. 전경(戰警)이 상주하는 살벌한 교정에도 봄은 왔다.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면 우리는 두근두근 어질어질 마음을 어디 두지 못했지.

1980년에 대학생이 된 ‘애린’의 짧은 학창시절과 회고적인 대학 생활로 시작된다. 4월 19일, 4월 혁명 20주년 기념 ‘비상계엄철폐’ 현수막을 내건 시위가 교정에서 일어날 때, 우리의 주인공인 애린은 여학생 화장실에서 도시락을 잡수시느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조차 몰랐다. 아니, 알고도 모른척 했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으나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던 1980년 봄은 우리를 배반하며 계엄군의 탱크 바퀴에 깔렸다. 갑작스런 휴교령은 내게 금지되었던 많은 것들과 친해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광주가 피로 물들 때, 내 위는 끈적끈적한 카페인으로 물들었다.

즐길 것들이 널렸는데 세상사를 걱정하고 싶지 않아, 추리소설처럼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았다.
(중략)
하루에 한 권씩,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처럼 얄팍한 책은 몇 시간 만에 독파하고 심심해 쩔쩔매다, 밤에 시내의 서점으로 ‘활자 아편’을 맞으러 달려갔다.

고생 끝에 S대에 진학한 애린은 당대의 이슈와 관심거리에서 눈을 돌리고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정숙한 여학생의 족쇄로부터의 해방감을 누리기에 바빴다.

  •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 <우상과 이성="">

너는 어디에 있었니?
이 지극히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던 시대가 한국의 1980년대였다.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공통된 원죄는 ‘나는 거기에 없었다’ 였다. 대학 근처에 있던 누구도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너는 완벽한 마네킹이었어.”
경혜의 말을 일기장에 옮길 때만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완벽한’ 무엇이었다니까.
(중략)
”너는 완벽한 마네킹이었어”를 지금 나는 “너는 허울뿐인 육체였어” 라고 번역한다.
(중략)
세미나와 술자리와 집회에 참가하느라 운동권 학생은 특별히 머리가 좋거나 성실한(영악한?) 경우를 제외하고 성적이 나빴다. 성적관리를 잘하는 애들은 ‘소시민적이다’ ‘이중적’이라고 매도당했다.

그러나 본디 독립심과 반항심이 투철하고, 책과 글을 통해 얻는 지적 유희를 즐기는 그녀에게 세상 일을 평생 무시한 채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서클’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마르크스를 공부하고, 운동권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더이상 사상과 이념은 그녀와 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사회주의 운동과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기 보다는, 자연스런 20대 대학생들의 반골기질, 반항심이 투영된 사회 저항적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늘 운동의 최전선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그녀조차 경찰을 피해 이리 저리 유배 다녔던 진짜 운동가였던 그의 두번째 남자친구에 비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였다.

책을 읽으면서 어른들이 늘 말하는 ‘그 당시의 시대정신’이 대체 무엇인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가족들의 정치 성향과, 20대의 남성이라는 특정 연령, 성별의 집단에 의해 정해진 나의 정치관과 세계관에 의하면 주사파와 소통하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고 오겠다는 야망을 가진 애린과 운동권 학생들은 정말로 공산주의의 첩자이거나 이 나라의 안보를 위협하는 스파이여야만 했다. ‘애린’이라는 캐릭터에 최영미 작가 본인의 과거와 과거에 대한 회상, 후회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80년대의 시대상황, 민주화 운동 등등은 단순한 독재체제와 그에 반하는 민주 항쟁, 혹은 이념 전쟁으로 양분하여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 서적을 읽다보면 불자가 되고, 마르크스 주의를 공부하기 위해 열심히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면 마르크스 주의자가 되는 것일까? 마르크스에 대해 관심이야 있지만서도 이러한 딜레마 때문에 쉽게 공부하지는 못하지만, 매우 피상적으로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를 바라보면 궤변적이고 교조적인 발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수정) 마르크스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폐단과 모순성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를 막시즘이 쥐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애초의 다른 전제로 출발한 사상으로부터 반대 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모순적으로 보인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로부터, 유물론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소련의 실패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기부정의 아이러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닐까?

사상과 이념과 같은 거대한 개념들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단편적인 생각을 나열한 것 뿐이다. 혹시나 이 글을 읽게 되고, 내 생각이 옹알이를 떼지 못한 어린아이의 생각 같이 여겨진다면 반론하거나, 내가 읽어볼 만한 책을 추천해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지한 분야에 대해 내 의견을 남겨놓는 것은, 나중에라도 내가 사상과 이념을 공부하거나 더 늙어서 어릴 적 생각들을 다시금 돌이켜 볼 때 ‘아, 저 때는 저런 생각을 했었구나’ 내지는 ‘생각의 깊이와 지식이 이만큼 늘었구나’를 판단하기 위한 척도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 루쉰의 <아Q정전>

역사 이래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가장 복잡한 구조물이 <자본> 아닐까. 다른 학자에 대한 비판이 지나쳐 비꼬는 마르크스의 문체에 시달리다 멋진 표현을 만나면 생기가 돌았다. ”자본은 물적 존재가 아니라 물적 존재에 의해 매개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위 글을 보면서 최근에 봤던 릴스가 생각났다. 대충 시간에 대한 밈이었다. 아이작 뉴턴은 ’시간은 절대적이다‘ 라고 말하였고,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상대적이다’ 라고 말하였을 때, 칼 마르크스는 ’시간은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인 시계를 판매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라고 말하는 밈이었다. 양자역학만 나오면 고양이를 소환하는 것 처럼 굉장히 피상적이고 겉핥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유머라는 것을 알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실은 올바른 비유인 것 처럼 무지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유머가 실은 굉장히 직관적이고 통찰을 주는 경우도 왕왕 있다.

앞서 말한 이유로(네가 심연을 들여다 보면 심연도 너를 들여다본다) 제대로 공부해 볼 엄두는 나지 않지만, 그리고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마르크스주의와 자본론을 공부한다고 말하고 다닐 용기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왜 수많은 철학자들과 당대의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에 심취하고 자본론을 연구하기에 바빴는지를 알기 위해 한번 탐독해 보고는 싶다.

나는 강민호. 나는 이애린. 민호야. 애린아. 사용가치가 없어질 이름을 부르며 이별을 연장했다. 민호에게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누구든 떠날="" 때는="">을 타이핑한 종이를 선물하고, 나는 돌아섰다. 집에 돌아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달콤하면서도 쓰라린 선율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음악을 틀어놓고 옷을 벗었다. 소나기가 퍼붓는 밤, 거울 앞에 발가벗고 서서 나는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사랑받지 못하고,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 육체가 아름다웠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디, 여름내 비가 추적였다. 지루한 장마에 갇혀, 어머니의 넋두리에 갇혀, 내 방에서 원고지를 메웠다. 빠져나오려 아우성치는 과거들이 한 가닥, 두 가닥 뽑혀 나왔다. 나오는 대로 받아쓰지 않고 감정을 조절하고 문장을 만들었다. 될 듯 말 듯, 소설의 문턱에서 나는 좌절했다. 한꺼번에 돌아보기에 그것들은 너무 가깝거나 멀었다.

‘사랑한다 라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로 시작해 ‘나는 가장 예리한 비수로 너를 찌르기 원한다’로 끝나는, 연애편지라기보다 리포트에 가까웠다. 사랑을 분석하고, 삶과 운동에 대한 나의 잘못된 태도를 비판한 여덟 장의 종이는 나를 변화시키려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나를 변화시키려는 그를, 나는 거부했다. …

<청동정원>이 최영미 작가의 과거에 대한 반성과 통찰, 회고록적 소설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는 뒷받침이 되는 글귀들이다. 이 책을 읽기 전 읽었던 같은 작가의 시집을 통해서도 느꼈지만 최영미 작가(시인)은 흘러가는 사건과 감정을 초점이 또렷한 고성능 카메라로 찍은 것 같이 생생하게 펼쳐 전달한다. 시가 아닌 산문임에도 여전히 그녀의 필력은 날아다니는 듯 하다. > (전략) > 라면 국물을 맛있게 들이키며 그는, 그들은 내게 시위하는 것 같았다. > 장재욱은 부자가 아니야. > 아비의 돈으로 출판사를 경영하지 않아. > 제국출판사는 장두남의 비자금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 자신의 결백함을 강조하는 몸짓을 통해 그가 사로잡힌 죄의식의 단면을 엿보았다. > 12시만 되면 총알처럼 튕겨나가 나는 사라졌다. 길 건너편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소설을 끼적였다. 구석의 탁자에 공책을 펼쳐놓고 내 안의 분노와 열망을 밖으로 내보냈다. 나의 일부였던 세계를 잃은 상실감을, 종이 위에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며 보상받았다. 검은 활자와 쉼표와 마침표로 이루어진 집에서 나는 비로소 자유를 맛보았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히 내 것이었던 점심시간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 네와 예는 다르다. ‘예’가 더 공손하고 상하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예’에는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 내가 당신을 나의 상관으로, 대장으로 모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의 해석이 맞나? 국어사전에서 ‘네’와 ‘예’는 의미 차이가 없다. > 80년대가 내게 남긴 것은 이념이 아니라 ‘정서’이다. 이념이나 사상은 변할 수 있지만,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옷을 고르는 취향, 타인을 대하는 태도, 말버릇이나 헤어스타일은 한번 굳어지면 평생을 간다.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 정의에 대한 갈증, 돈과 악수하지 않는 손, 권력에 굽실거리지 않는 허리를 그 시절은 내게 물려주었다. > 창가는 자신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장소이다. 창밖을 보는 척하며 아무도 보지 않아도 되니까. > … > 4월의 신록처럼 싱싱했던 우리의 고뇌는 어디로 갔는지. 매연을 들이킨 은행잎처럼 누렇게 시든 한숨이 소주처럼 맑은 개울에 빠졌다. 열변을 토하는 부리들과 떨어져, 계절의 허망한 끝을 잡고 술잔을 비우던 수줍은 여학생이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우리들의 강이 말라 흙으로 메워지고 그곳의 모든 것이 진한 그리움으로 변할 줄을 알았다면,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날 그 시간을 내 것으로 붙들었으리. 작금의 우리 나라의 상황을 ’분열‘ 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진보와 보수로, 남과 여로, 2030과 4050이라는 세대로 잘게 쪼개어진 국민들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기를 멈추고 자신을 둘러싼 집단에 끌려다니고, 자발적으로 이에 동조한다. 마치 상어에 의해 자신들의 떼거리가 조종당하는 지도 모르고 자기 앞의 방향만을 따라 휙휙 끌려다니는 피라미 떼 같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자신이나 자신의 집단의 눈앞의 이익이라는 미끼만을 바라보고 조종당하는 무리 속 개인이 지금 우리들의 현주소이다. 무리라는 허상 밖으로 나온 한 마리의 물고기는 자신의 뚜렷한 주관과 판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가장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이 책을 통해 앞서 언급한 세 가지 특성에 대해 정 반대에 속해있는 (진보적이고, 여성이며, 80년대를 대학생으로 살아간) 지식인에게 이입하여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의와는 다르지만 그녀의 사고방식과 인생관은 그녀가 살아내었던 과거에 의해 이해될 수 있었고 충분히 공감을 살만하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은 상대주의로 귀결되지 않고 그들의 과거와 치열한 투쟁에 대한 간접 경험을 통해 더욱더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찾게 된 것 같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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