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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급류

[독후감] 급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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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급류에 빨려 들어가듯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 “소울메이트” 가 생각났다. 한 명이 도시에서 시골로 전학을 오면서 시골에서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는 점이라던지, 갈등 상황과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가치관 혹은 세계관이 판이하게 차이나는 점이라던지, 그러면서도 어린 시절을 기억들과 추억에 의해 서로에게 의존적인 점들이 어떠한 정형화된 스토리나 플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유사하게 보였다.

다른 작품과의 유사성 때문에 책이 지루하거나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되려 만나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 만나는 해와 달처럼 언젠가는 재회하고 갈등이 해소되는 결말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기에 그들이 서로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생각들과 네러티브가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특히 주인공들의 1인칭 시점의 생각들을 통해 묘사되는 감정들과 심경에 대한 표현이 인상깊었다. 표현들은 단순한 사건의 묘사도, 구구절절한 감정어린 호소도 아니지만 덤덤한 목소리로 툭 던지듯 내려놓은 말들이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풀어 쓴 생각의 실타래들을 보며 나의 생각을 누군가 정확히 읽고 문자로 옮겨둔 것과 같아 때때로 기시감을 느끼기도 했다.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이 글을 읽는다면 웬 우울증 환자들의 도착적 사랑이야기를 구구절절히 풀어놨냐며 혹평을 쏟아놓을지도 모른다. 도담이나 해솔이나 정신과에서 무슨무슨 병명의 진단서를 주렁주렁 달아올 것 같다는 점은 똑같고,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특이한(혹은 병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개개인의 주인공에게 이입하는 것이 아닌, 등장인물과 그 주변 관계들을 통해 ‘급류’라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컨셉트를 조망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도담과 해솔이 어린시절을 보내는 진평에서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일련의 사건들을 이용해 물살을 조성하고, 붉은 실로 연결된 종이배와 쇳덩이를 급류에 띄워올린 것 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둘 사이의 지독한 악연이 연출한다.

결말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연의 완전한 단절로 붉은 실을 끊어버린 후 다시 찾아온 고요한 수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면 어땠을까.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결말은 과연 그들의 얽히고 섥힌 사랑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케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Spoiler

하지만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해솔과의 관계를 표현하기에 너무 납작하다고 도담은 생각했다.

그들의 사랑이 단순한 어린 시절의 첫사랑으로 치부되기엔 너무 납작한 까닭은 무엇일까? 도담의 아버지와 해솔의 어머니의 사고로 인한 죽음은 두 주인공 사이의 악연의 시작임과 동시에 두 사람이 나아갈 미래에 대한 모형이기도 하다. 첫사랑이라 표현하기에는 지리멸렬한 악연에 가까운 두 사람의 관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향방을 알 수 없는 급류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그건 과연 위대한 사랑일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새도 없는 즉각적인 반응이 정말 용기와 관련 있는 걸까? 자기 자식이니까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 같은거 아닐까? 그럼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을 위해 뛰어드는 경우는 뭐지? 물에 빠져 위태로운 강아지나 고양이를 위해서라면? 뛰어드는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물에 빠진 게 토끼나 닭이라면? 만약 평생 집에 소홀하던 사람이 물에 빠진 가족을 위해 뛰어들면 그걸로 사랑이 증명되는 걸까……

급류에 휩쓸리는 구명대상자를 발견하면, 물 속으로 뛰어들지 말고 주변의 튜브나 장대 등을 이용하여 구출해야 한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도리어 둘 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행동은 위대하고 숭고한 사랑일까? 역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뛰어들지 못한다면 그 것은 사랑이 아닐까?

‘물에 빠진 놈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과는 의도가 살짝 빗겨나 있기는 하지만,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을 불편한 생명의 은인으로 여길 바에야 차라리 죽는게 속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은혜를 갚을 바에야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서라도 타인에게 죄책감을 주기를 택한다. 타인에게 어떠한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자신의 인생이 평가절하되어도 되는 것일까.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신 도담은 냉소에 빠졌다. 결국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소통보다 침묵을 더 신뢰했다. 심각하지 않고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었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도담의 아버지와 해솔의 어머니의 부적절한 사랑이 그들의 죽음을 자초하였고, 무엇보다도 부모의 불륜을 눈감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도담의 호기 어린 객기가 두 사람을, 아니 네 사람을 급류로 빠트려 버린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다. 거대한 세계에 의해 필연적이고 때로는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서사가 아니다. 사고가 일어났던 비가 퍼붓는 그날 밤 계곡에 있었던 모두에게 참담한 사건에 대한 선택의 책임이 있었다. 도담을 말리려 했지만 구태여 라이트를 짊어지고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온, 그리고 도담의 아버지에게 두번이나 생명을 구원받은 해솔조차도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이 책임은 족쇄가 되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을 묶어두는 요인이 된다.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지 않고 서로의 손을 붙잡고 급류속으로 가라앉는, 그러면서도 해솔을 한마음으로 살리려는 두 어른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겹쳐 보인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서로를 의지한다는 건 함께 가라앉는 것 같았기에. 도담은 더이상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고 이후 그들은 단절되었다. 인간은 타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서 혼자 있을 때에도 타인과 대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회상과 후회를 통해 사회적 뇌를 사용한다고 한다. 서로에게 전해지지 않은 말풍선들로 마음을 부풀리고, 또 부풀려서 터트리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 그 몸집을 불린다. 어린 나이에 감내하기 어려운 일을 겪은 그들이기에 멀어짐은 불가피한, 타율에 의한 강제적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엮여버린 이상, 그들의 재회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일단 도담이 자신을 망가뜨리려 하자 그 일을 도와줄 사람들은 넘쳐났다. 상처 입은 사람의 냄새는 애써 덮고 감추어도 눈빛에서, 걸음걸이에서,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도담이 외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남자들은 어디선가 나타나 접근했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강바닥에 숨어 있다 모여드는 다슬기처럼. 도담은 그들과 술을 마셨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도담은 회피를, 해솔은 대면을 택했다. 어린 해솔에게는 잘못이 없음을 알면서도 자기 새끼를 탓하지 못하고 남의 자식 핑계를 대며 한탄할 수 밖에 없는 도담의 어머니의 행태를 답습하듯 그녀는 그 날 이후 단 한번도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망가뜨림으로 자신을 옥죄어 오는 죄책감으로부터 도피했다. 술로, 사람으로, 자해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행위는 책임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런 일을 겪은 뒤의 자신은 망가져야 한다는 자신이 설정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함으로 스스로를 속죄하는, 일종의 책임회피이자 책임전가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들이 기대한 만큼 비극을 겪은 사람이 충분히 망가지지 않으면 일부러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더이상 자신이라는 책을 끝까지 읽음으로써 함께 지옥에 빠질 사람은 지구상에 해솔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도담은 가시 돋힌 냉소적인 태도로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않음으로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했다.

사고 이후 해솔은 이성이 아닌 감정을 따르는 것을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금지했다. 감정을 따르면 그 결과가 참혹하리라고 믿었다.

역으로 해솔은 자신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준 도담의 아버지를 자신에게 투영하여 그 날에 자신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책임을 본인 스스로에게 전가하였다. 재회한 도담과의 불안한 동거 생활과, 미래의 계획이 좌초된 이후 현실에 대한 도피처로 그는 소방대원을 선택했다. ‘불’이라는, 물이나 급류와는 반대되는 소재를 통해 대비를 주려 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타인의 생명을 대가로 구해진 스스로의 인생의 가치를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새 자신의 몸을 던지기를 망설이지 않는 숭고한 소방관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아니, 적어도 타인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들의 마지막 재회 전까지 그들의 연인이었던 ‘선화’와 ‘승주’는 거의 생불의 수준에 도달한 성인군자 같다. 그런 비현실적 캐릭터성이 두 주인공을 조명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 점은 아쉽다만, 그들의 인생에서 ‘선화’와 ‘승주’는 잠깐의 도피처에 불과하였고 다른 연인과 함께 한 모든 순간 동안 도담과 해솔은 서로를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낼 수 없었다. 6년동안의 사랑이, 그 시간들이 ‘도담’이라는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는 사람에 의해 한순간에 쓰레기통으로 던져진 선화. 그리고 서로를 쿨한 관계라고 자부하며 서로를 냉소 클럽의 회원으로 여겼지만 도담의 냉담한 결정에 자신의 쿨하지 못한 마음을 깨닫고 어떻게 그렇게 배신할 수 있냐고 도담에게 매달린 승주. 그러나 그 어떤 상황과 인물도 두 사람의 재회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픔을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방법이 조금 다를 뿐 둘의 인연은 칡과 등나무처럼 서로를 옭아매는, 다시 말해 서로에게 얽히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해피엔딩은, 서로 좋게든 안좋게든 관계를 끊어 버리고 각자의 삶을 사는 엔딩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손을 잡고 급류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선택을 하고, 이것으로 책이 마무리 된다. 그들이 어떻게 앞으로의 일을 극복하고 살게 될지의 후일담은 무책임할 정도로 툭 던지듯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버린다. 공허함과 결핍을 동력으로 하는 소모적인 사랑이 더이상은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더 이상 서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은 최고의 사랑고백이 아닌 칡과 등나무처럼 얽혀왔던 그들의 추한 과거에 대한 진단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급류>라는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결말이 너무 작위적이고 끼워맞추기 식인 것 같았는데,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작위성 없는 소설이야말로 작가의 의도가 반영될 여지가 없는, 소설로써의 가치를 잃은 글이 아닐까? 물론 K-드라마 같은 의도된 결말과 연출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의 결말이 그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Quotes

아래는 읽으면서 북마크 해두었던 글귀 중 인상깊다고 생각한 내용들을 나열한 것이다.

앞서 다루었던 인용은 중복하여 넣지 않았다.

“시련에는 다 이유가 있는거란다.”
교회에 다니는 할머니는 밤마다 해솔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준다고, 믿기만 하면 죄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렇게 대단한 하나님이 조건부 용서라니. 정말이지 속 좁고 쪼잔한 거래 아닌가. 그렇게 쉽게 용서받을 리 없었다. 신이 용서한다고 해도, 해솔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였다.

“너는 나한테 좀 벽을 두는 것 같아. 언제쯤 마음을 열 거야?”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느낀다면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고 어떻게 하면 상대가 그렇게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의 모든 비밀을 말하면 되는 걸까. 그렇게 나누고 열면 되는 걸까. 도담은 용기를 내 진평에서의 일을 태준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태준의 눈빛은 도담에게 쏟아지던 진평의 눈빛들과 닮아 있었다. 이후 태준의 연락은 눈에 띄게 뜸해졌고, 결국 태준은 비겁하게 눈을 피하며 도담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네 어두운 그늘까지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들과 비슷한 나이니 태준은 남들처럼 추억을 만들고 웃고 즐기는 연애를 바랄 뿐이었다. 상대방의 지옥을 짊어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연애라는 건 상대방이라는 책을 읽는 거라고, 그렇게 두 배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거라고, 태준은 말한 적이 있었다. 도담은 자신이 펼치고 싶지 않은 책, 끝까지 읽고 싶지 않은 책처럼 느껴졌다. 전부 말 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은 태준에게 자신이 그토록 상처를 받은 게 놀라웠다.

누가 사랑이라는 치사한 말을 발명했을까. 자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을 두 글자로 퉁치는 것처럼, 사기처럼, 기만처럼 느껴졌다.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구나. 도담은 익숙한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며칠 전 해솔과 함께 식사를 하고 카페가 닫을 때까지 대화를 나눈 3시간이 3분처럼 짧게 느껴졌다. 도담은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 해솔에게 느끼는 감정, 승주에게는 한 번도느끼지 않았던 강렬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해솔과 얽힌 사연 때문에 연상되는 슬픔. 같은 상처를 가진 동질감. 연민이다. 우리가 보통 지독한 인연은 아니지. 해솔과의 재회에 운명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건 우연에도 인과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이다. 추억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 버린 한때에 대한 슬픔일 수도.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걱정하고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 꽉 끌어안고 안기고 싶은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시커먼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Comment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심리 상태와 감정선을 따라가기보다 급류처럼 이야기 속에 몸을 풍덩 빠트리게 만드는,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그런 책인 것 같다. 쉽게 읽혀서 좋았고, 작가의 표현력과 필력에 감탄했다. 서로의 반쪽이 되어주는, 서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랑이 로맨틱하고 애달파 보이지만 실상은 지리멸렬하고 불행한 파국으로 치닿게 하는 사랑이었다. 어떻게든 그걸 무마하려 최대한 좋은 결말로 유도한 작가의 노력이 보이지만은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랑은 별로 건강한 관계가 아닌 것 같다는 나의 기존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했다.

만약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정신병 걸릴 것 같은 심신미약 상태에서는 읽지 말고, 행복하고 밝은 심리 상태일 때 읽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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